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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탈근대 교육 연구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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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 type="html">탈근대 시대의 새로운 교육과 교육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는 교육자와 교육연구자들의 모임입니다.</subtitle>
 <updated>2010-03-07T10:31:05+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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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부정변증법</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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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새로운 시대의 교육과 교육운동의 길을 찾아 출항합니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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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08-02T23:13:35+09:00</updated>
  <published>2019-08-02T22:59:00+09:00</published>
  <summary type="html"> 미래의 희망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틀란티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교육을, 학교를,&amp;nbsp; 교사를 욕했습니까? 또 얼마나 학교를 교사를 상대로 희망을 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교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연히 학교가 교사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비판하지만, 어떤 시대인지, 어떤 뒤떨어짐인지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학교를, 어떤 교육을, 어떤 교사를 희망하는지 스스로에게 말 할 수 있습니까? 이곳은 학교를 그리고 교사를 알고, 알게된 만큼 비판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우리가 어떤 희망을 세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교사,교수, 교육연구자들이 모여서 결성한 &amp;quot;탈근대 교육연구회&amp;quot;의 팀 블로그입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교육, 그리고 이를 향한 새로운 교육운동의 항로를 찾아보는 저 희망의 항해도를 그리는 모험에 동참해 보지 않으시렵니까?&lt;p&gt;&lt;strong&gt;&lt;a href=&quot;http://www.postedu.net/4&quot;&gt;글 전체보기&lt;/a&gt;&lt;/strong&gt;&lt;/p&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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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프랑스의 교육 : 정부에서 보는 교육에 대한 투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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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키시야스</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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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0-03-06T00:28:19+09:00</updated>
  <published>2010-03-06T00:04:28+09:00</published>
  <summary type="html">이번 글을 쓰기 전까지는 항상 교육 해당자들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글을 써 왔다. 하지만 교육을 받는 쪽이 있으면 제공하는 쪽도 있어야 하며, 그 양쪽의 타협선에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만큼 교육을 제공하는 쪽의 관점 역시 중요하게 알아야 하며, 그러한 교육 제공자의 관점을 앎으로 인해서 더욱 사회인으로써의 교육 기능이 발전하리라 생각하며, 그와 동시에 교육을 받는 입장에서 주장해야 할 권리를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프랑스에서 교육에 투자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일부 분석하여 보고자 한다. 1. 교육에 대한 지원은 복지가 아닌 투자 프 랑스에서 교육에 대한 지원은 절대 복지의 항목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건강도, 문화도 복지인 국가에서 어떻게 교육이 복지가 아니냐고 하겠지만, 기초적인 교육은 국가를 지탱하기 위한 기본적인 틀 이라는 점에서 복지가 아니라 의무에 해당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의무교육에 대한 이야기이며, 대학교 이상의 고등 교육에 대해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더 많은 부를 창조하게 해주며, 그로 인해서 국가의 이익은 꾸준히 증가하게 된다. 그렇기에 프랑스에서는 교육에 들어가는 예산은 복지의 개념이 아닌 투자의 개념으로써, 그리고 그 투자의 회수를 실력있는 인재들을 양성해 냄으로써 얻어 가는것이다. 국내 모 대학의 전경 이 대학 총장님 등록금이 높은게 좋은 교육 받는 반증이라고요? 머리가 부족한건 알겠는데 부족한건 좀 깨닳으시죠? 이렇게 투자의 개념으로 교육을 시키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교육을 받는 사람들에게 절대 쉽게 학위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 학문에 힘을 쏟을 수 밖에 없으며, 그로 인한 학문적인 발전은 돈으로 사올 수 없는 다양한 발전을 지탱하게 하여 준다. 실제로 프랑스는 인문학과 이공계 어느쪽으로 가리지 않고 세계적인 수준의 독자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기술적 독립은 저러한 국가의 투자가 뒷받침 되어야 하는 것이다. 2. 교육을 통한 사회적 손실의 최소화 프 랑스에서 교육은 저런 국가의 발전만을 가져 오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한가지 부산물에 불과하다. 그 또 다른 부산물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사회적 손실의 최소화이다. 프랑스의 가정 교육 편에서도 소개할 내용이지만 프랑스의 교육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바로 책임감이다. 유년기에 책임과 자유가 동시에 없지만 계속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배워가면서 점점 책임감과 자유를 부여해줌으로써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교육 하는데 집중한다. 그렇기에 납세, 시위, 노동등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잃는 행위는 매우 천박한 행위로 규정되며, 그로 인해서 프랑스에서 자신의 권리를 찾는 것 만큼 책임을 못 다하는 것도 견딜 수 없는 일이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 사건 이 사건 이대로 두는게 책임지는건 아닐텐데? 이게 자유의 무게를 모르면 생겨나는 사회적 손실이 아니면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그 리고 이러한 자유의 책임감을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유와 책임은 떨어뜨릴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이것이 사회의 도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사회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더 잘 살 수 있는 사회라면 어느 쪽의 사회가 더&amp;nbsp; 잘 돌아갈 수 있는지의 여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일이다. 이렇듯 프랑스에서는 교육을 통하여 사회 구성원들의 책임감을 확고히 하며 그 책임의 신성함을 깨닳게 해줌으로 인해서 사회에서 나타날 다양한 사회적 낭비를 막아주고 감시 할 수 있는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다. 3. 교육에 따른 국가의 이익 증대 교 육은 단순히 학문의 발달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학문이 발달하게 되면, 그 학문을 배우기 위한 수많은 유학생들이 몰려오며, 그로 인해서 더 많은 인재를 유치하기도 하고, 민간 외교의 선봉이 되며,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 생활하면서 자국의 GDP가 증가하는등 수많은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정부에서 다른 방향으로 돈을 쓰고, 발전소를 건설해주고, 땅을 판다고 해서 나오는 것들이 아니다. 이렇듯 교육이라는 분야에 투자를 함으로 인해서 기대되는 발전은 단순히 인재의 수급만이 아닌 포괄적인 사회 간접 자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파나마 운하의 모습 이런게 필요한 나라도 있는데, 저런게 필요 없는 나라는 교육에 돈쓰는게 낫지 않을까? 결론 프 랑스 정부의 교육에 대한 지출은 복지라는 면 보다 오히려 투자라는 면이 부각됨으로 인해서 더욱 발전하는 기회가 되어 왔으며, 정부가 교육에 지출 하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는 것을 공감함으로 인해서 많은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교육에 대한 공공의 지출은 결국 사회를 풍요롭게 해주며, 삶을 인간답게 해 주는 기본적인 사회&amp;nbsp; 간접자본이고, 그 파급력은 교통 수단에 비할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육보다 밥이 중요한 나라가 있고, 그런 나라에게 교육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갓난 아기에게 고기를 먹이는 행위라고 생각 하지만, 이 글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사회적 기반이 마련되어 있는 국가라면 교통수단을 하나 더 마련하려고 자연을 훼손하기 보다는 교육적 투자를 함으로 인해서 더욱 미래적 가치를 지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 하는 바이다. &lt;p&gt;&lt;strong&gt;&lt;a href=&quot;http://www.postedu.net/29&quot;&gt;글 전체보기&lt;/a&gt;&lt;/strong&gt;&lt;/p&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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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민주주의와교육 : 2) 사회 기능으로서의 교육</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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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필인</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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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0-01-16T11:41:01+09:00</updated>
  <published>2010-01-16T11:21:25+09:00</published>
  <summary type="html"> 2장. 사회 기능으로서의 교육 (Education As A Social Function) &amp;nbsp; 2 장의 요약문은 두 문단으로 되어 있네요. 일단 첫번째 문단의 내용만 풀어봤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작업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한 이틀 꼬박 컴앞에 앉아 책과 씨름하며 작업했습니다. 영문원서와 이홍우, 그리고 김성숙의 책을 동시에 대조하며 정리하다 보니 일이 조금 어렵네요. 해서, 앞으로 진도가 잘 나가지 않더라도 제 입장을 이해해주십사 하는 뜻에서... &amp;nbsp; 그냥 요약문만 읽어서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실 것 같습니다.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암튼, 열공~~ &amp;nbsp; (요약 -1) 연속해서 발전해가는 사회의 생명에 필요한 태도나 성향을 아이들 내부에 발달시키는 일은, 신념이나 정서나 지식의 직접적인 전달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환경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환경은 생물의 특징인 활동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여러 조건의 총화(總和)이다. 또 사회적 환경이란, 그 성원 중 어떤 한 사람의 활동에 굳게 결부되어 있는 동료들의 활동 전체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어떤 개인이 그 어떤 연대적 활동에 관여, 즉 참가하는 정도에 따라 진정으로 교육적 효과를 발휘한다. 사람은 공동 활동에서의 자기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그 공동 활동을 추진시키는 목적을 자기 것으로 하고, 그 방법이나 대상을 숙지하며, 필요한 기술을 획득하여 그 정서적 기풍에 젖게 된다. (풀이-1) 제 1장에서, 사회라는 유기체는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자기갱신을 통해 존속․발전해 가는데, 이 갱신은 집단의 미성숙한 구성원의 교육적 성장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사회집단이 소중히 여기는 그 무엇(태도나 성향)을 아이들에게 강제로 주입시킬 수는 없다. “말을 물가에 끌고 갈 수는 있어도 강제로 물을 먹일 수 없다”는 표현이 그대로 이 책에 등장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에 대한 듀이의 대답은 “환경의 작용으로 특정한 반응을 유발하는 것”이라 한다(2-1-3). 환경을 어떻게 작용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연스럽게 답이 나온다. # (2-1-3)에서, 2는 챕터(장)수, 1은 챕터 내의 작은 제목 번호, 3은 그 번호 내에서의 셋째문단을 뜻한다. &amp;nbsp; ‘환경’에 대한 듀이의 정의를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듀이에 의하면, 무엇을 통해 인간이 변화되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 사람의 환경(The things with which a man varies are his genuine environment)이라고 한다. 계속해서 듀이는 환경을 다시 정의하기를... “요컨대, 환경이란 어떤 생명체의 특징적인 활동을 조장하거나 저해하는, 또는 자극하거나 금지하는 조건을 말한다.”(2-1-4) 이 문장에서 “특징적인(characteristic)”이란 수식어가 중요하다. 위의 &amp;lt;요약문&amp;gt; 셋째 줄에서 내가 붉은색 처리한 ‘특징인’이란 낱말도 영어의 ‘characteristic(특징적인)’에 해당한다. 본문에서 듀이는 사람마다 특징적인 환경이 다 다르다고 한다. 이를테면, 전교조에 들고서 자신의 교직관이나 행동양식이 바뀌었다면 전교조교사에게 전교조라는 조직이 중요한 환경이지만, 다른 교사에게 전교조는 별 중요한 환경이 못 된다. 그 다음으로, ‘사회적 환경’이란 작은 제목으로 글의 주제가 넘어가는데, 이 대목에서 듀이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행동습관을 규정하는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환경임을 강조한다. “타자와 더불어 활동하는 존재(즉, 인간)는 사회적 환경에 놓여있다. 그가 무엇을 행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행할 수가 있는가는 다른 사람의 기대나 요구, 찬성, 비난을 통해 정해진다.” (2-2-1) 나아가 듀이는 사회적 생활환경(medium)이 어떻게 미성숙한 어린이들을 양육하는가에 대해 자문자답을 한다. 이에 대한 듀이의 관점은 행동주의심리학의 그것과도 유사하다. 2-2-2문단의 말미에 미로 속의 쥐가 음식을 찾아가는 ‘습관’을 형성하는 예가 언급되는데 이는 쏜다이크(Thorndike)를 연상케 한다. - 미국을 대표하는 심리학자 쏜다이크의 이력을 보면 듀이와 공통점이 많다. 둘 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학자들이며 쏜다이크는 프래그머티즘의 창시자인 James의 제자이다. 사회적 환경 속에서 인간의 행동이 변화해가는 이치가 동물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듀이의 유물론적인 설명방식은 신선하기도 하지만 더 좋은 것은, 듀이의 그런 사고가 기계적 유물론에 그치지 않는 점이다. 듀이는 그런 방식을 교육과 구별하여 ‘훈련’으로 규정한다. 바로 이 점이 듀이가 행동주의심리학자들(즉, 기계적 유물론자들)과 다른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 교육과 훈련을 구분짓는 기준이 뭔가? 이에 대해 듀이는 말(馬)이 길들여지는 예를 통해 특유의 명쾌한 논리를 펼친다. 말이 주인이 바라는대로 행동을 변화시킬 때, 말과 주인은 동반자적 관계에 있지 아니하다. 만약에 말이 동반자가 된다면, 말은 그 공동의 활동에 종사함으로써 그 일에서 상대방이 가지는 것과 동일한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2-2-4문단) (위의 문장에서 ‘동반자’란 말은 영어로 ‘partner&amp;#039;인데, 김성숙 번역본에서는 &amp;#039;공동의 구성원’, 이홍우는 ‘동업자’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이 낱말보다 더 중요한 키워드는 ‘관심’이다. 영어의 interest는 관심과 흥미, 두 가지의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김성숙은 ‘흥미’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문맥에서는 ‘관심’으로 옮겨야 한다. 번역하는 사람이 원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해낼 때 올바른 번역이 이루어진다. 김성숙은 아마도 교육학 전공이 아닌듯하여 듀이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위의 훌륭한 설명에서 교육과 훈련을 구별짓는 기준이 나왔다. “교육자와 피교육자 사이의 공동의 관심”이다. 그 관심이 일방적이거나 제 팔 제 흔들기 식일 경우, 교육이 아니라 훈련이다. 말의 관심은 먹이 또는 채찍을 피하기이고 주인의 관심은 스피드 혹은 돈벌이이기에 이 둘 사이엔 공동의 관심이 없다. 마찬가지로!!!!!! 교사의 관심은 승진점수 또는 교원평가 점수에 있고 학생의 관심은 부모님한테 인정받기나 터지지 않기에 있다면,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훈련이다. 그 다음 문단(2-2-5) 첫째 줄에서 듀이가 하는 말을 보라. “... 많은 경우에 - 너무나 많은 경우에 - 미성숙한 인간의 활동은 오직 유용한 습관을 가지도록 하는 목적으로 조종된다.” 앞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에 대해 듀이는 “환경의 작용으로 특정한 반응을 유발하는 것”이라 했다는 점을 일러두었는데, 이젠 환경을 어떻게 작용시킬 것인가에 대한 답이 나왔다. 미성숙한 이들의 관심과 사회집단의 관심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 일치를 위해 듀이는 ‘참여’를 강조한다. 개인을 단체 활동의 참여자로 만들어서, 그로 하여금 단체의 성공을 자기 자신의 성공으로, 단체의 실패를 자신의 실패로 느끼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완성단계이다(2-2-6). ‘교육과 사회’라는 화두로 이 장에서 듀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교육은 사회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amp;lt;요약문&amp;gt;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교육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장 좋은 예로서 ‘언어의 습득’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듀이에 따르면 어린 아이가 어떤 낱말을 익히는 것은 아이와 부모 사이의 공동의 경험 속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말이 사용되기 때문이다(2-2-9). 공동의 경험. 그렇다. 공동의 경험에 터하지 않은 교육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런 교육은 그저 관념의 놀음에 지나지 않으며 그래서 아이들이 공부에 흥미도 못 느끼며 또 쓸데없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특히 &amp;lt;사회&amp;gt; 교과가 그러하다. 교재의 구성이 대부분 아이들의 경험과 동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일상의 리얼리티와도 거리가 멀다. 이를테면, 경찰의 본분이 시민의 생명을 지켜주는 역할이라거나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관념들은 ‘용산철거민’ 뉴스를 대하는 순간 한 방에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나 죤 듀이가 모르는 것이 있다. ‘공동의 경험’에 기초하지도 않고 일상의 현실과도 동떨어진 지식인 줄 뻔히 알면서 학교가 아이들에게 그런 허구적 관념을 주입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계급사회에서 계급적 모순을 은폐하여 사회적 갈등을 차단하고 사회적 통합을 강조하는 것이 자본주의 교육의 목표이기 때문에 학교교육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듀이가 교육과 사회의 불가분의 성격을 강조한 것은 옳지만, 듀이가 말하는 그런 교육은 계급적 모순이 없는 공동체사회-(원시)공산사회-에서나 가능하다. 교육은 사회 속에서 사회와 더불어 기능하지만, 사회는 계급 헤게모니에 의해 정치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amp;quot;교육의 정치적 중립&amp;quot;이란 말처럼 허구적인 말도 없다. 프레이리(Paulo Freire)가 말하듯이, 모든 교육은 정치적이다. 철거민의 입장에서 용산 사태를 교과서에 담는 것은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죤 듀이의 교육에서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한계이다.&amp;nbsp; &lt;p&gt;&lt;strong&gt;&lt;a href=&quot;http://www.postedu.net/28&quot;&gt;글 전체보기&lt;/a&gt;&lt;/strong&gt;&lt;/p&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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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3년 정도를 바라보고 있는 장기 계획인 대안 교과서 개발계획입니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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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0-01-11T14:30:29+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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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 사회 대안교과서 개발 취지 및 계획 &amp;nbsp; &amp;lt;?xml:namespace prefix = o ns = &amp;quot;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amp;quot; /&amp;gt; 1. 개발 취지 &amp;nbsp; 1.1. 사회과의 성격 -사회과는 사회과학적 개념을 이해함과 동시에 이를 통해 민주시민의 자질을 함양하는 실천적인 목표를 가진 과목 -개념의 이해는 단순한 암기가 아니라 그 속에 포괄된 제 함의들을 비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이는 민주시민으로서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재료로서 사용될 수 있어야 함.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과학의 여러 개념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학생들이 살아가게 될 세상에 대한 창이 되어야 하며 인식의 도구가 되어야 함. 따라서 이는 그것이 구성되는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학생들이 자신의 삶을 통해(간접적이라도) 검증하고 가치부여할 수 있게 해야 함. &amp;nbsp; 1.2. 현행 사회과 교과서의 문제점 현행 사회과 교과서는 다음과 같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 - 무수히 많은 개념들이 닫힌 개념, 즉 죽은 개념으로 제시되고 있음. 사회과학의 개념은 자연과학과 달리 3차원적 속성(사실 진술, 당위 진술, 토의적 진술)을 가지고 있음. 즉, 어떤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며, 또한 그 진술은 현실과 일치한다기 보다는 현실에 대한 어떤 준거의 역할을 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는 현실에 대해 토의를 제기하는 것. 그러나 현행 교과서는 사실진술이라는 1차원적 속성만을 가진 개념으로 제시되어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봉쇄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 (ex: 우리 헌법의 기본권은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 자유, 평등 등... etc: 이 속에는 그렇다, 그래야 한다, 과연 그런가? 이 세 차원이 모두 나와야 하지만 실제 그렇게 제시되지 않고 있다) -개념들이 탈맥락적으로 제시되고 있음. 사회과학의 개념들은 실제 다양한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논쟁적으로 구성되어 온 것임. 그런데 현행 교과서는 마치 그런 개념들, 그리고 그 개념들이 대표하고 있는 사실들이 기존에 그런 형태로 존재했고, 발견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제시되고 있음. 특히 경제교과의 경우는 마치 물리학 법칙처럼 제시되고 있음 -교과와 실제간의 괴리가 심각함. 이는 위의 두 문제에서 비롯됨. 현실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거나 심하게 괴리된 추상적인 개념들의 체계로 사회과의 여러 내용이 전락하고 있음. “교과서적”이라는 말이 보여주듯, 교과서는 현실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이상으로 전락하고 있음. -교과와 해당 사회과학 분야와의 괴리도 심각함. 사회과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는 여러 사회과학들의 내용을 흡수하지 못하고, 이전 교육과정에서부터 계속 반복되어 온 개념체계들의 자기참조적 체계가 되었음. 그 결과 실제 연구되고 있는 사회과학 따로, 사회교과 따로가 되어 있음. 이는 특히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분야에서 심각함. 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하는 사람도 고등학교 사회문화 교과서를 보면 낯선 내용이 많음(세계적으로 표준적인 사회학 교과서인 기든스의 교과서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차이가 많은지 확인 가능). 경제학 경우에도 여전히 신고전주의학파의 입장에서 적절히 케인즈주의를 버무린 사무엘슨 경제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내쉬, 스티글리츠, 센 등 최근의 경제학적 업적은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음. -사례, 활동 등이 정치적인 자기검열로 인해 적절히 제시되지 못하고, 토론을 유도하는 사례나 읽을거리도 따라서 이미 맥이 빠져있음 &amp;nbsp; 2. 개발 계획 &amp;nbsp; 2.1. 대안교과서의 방향 -살아있는 교과서: 개념들이 죽은 개념이 아니라 3차원적으로 살아있는 교과서 -싱싱한(?) 교과서: 최신의 사회과학 연구의 성과물을 충실히 반영할 수 있는 교과서 -성장하는 교과서: 향후 사회과학의 성과들이 유연하게 접목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교과서 -활동하는 교과서: 실제 사회생활 속에서 학습한 내용을 펼쳐나가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교과서 &amp;nbsp; 2.2. 대안교과서 내용 체계 -심화선택교과 체제에 따라 정치, 경제, 사회문화로 구성함. -각 분야별로 교과서와 읽기자료집(고전 및 문헌 발췌록)으로 구성함. 교과서는 개발 준비중이며 읽기자료집은 정치, 사회문화는 거의 개발되어 있음. -각 분야별 교과서는 개정교육과정의 심화선택 교과의 목차를 (아직 나오지 않음) 충분히 고려하여 이와 맞추어 나가면서 동시에 여기에 앞에서 제시한 문제점들을 극복해 나가는 형태로 진행함. 다만 사회문화의 경우는 실제 연구되는 사회학과 교과서의 괴리가 워낙 커서 처음부터 구성해야 할 필요가 있음. &amp;nbsp; 3. 더 나아가..... - 초등학생 용, 중학생용의 보다 가볍고 쉬운 책도 개발할 필요가 있음 &amp;nbsp; &lt;p&gt;&lt;strong&gt;&lt;a href=&quot;http://www.postedu.net/27&quot;&gt;글 전체보기&lt;/a&gt;&lt;/strong&gt;&lt;/p&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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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듀이-1장. 삶의 필연성으로서의 교육</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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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0-01-11T14:22:05+09:00</published>
  <summary type="html">&amp;nbsp; 1장. 삶의 필연성으로서의 교육 (Education As A Necessity of Life) (요약, Summary) 존재를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삶의 본질이다. 이 유지는 부단한 갱신에 의해서만 보장되는 만큼, 삶은 자기갱신의 과정이다. 영양과 생식이 생물학적인 삶에 필요한 만큼, 교육은 사회적 삶에 필요하다. 이 교육은 일차적으로 의사소통을 통한 전달로 이루어진다. 의사소통은 경험이 공동 소유가 될 때 까지 경험에 참여하는 과정이다. 의사소통은 그것에 참여하는 쌍방의 성향에 수정을 가한다. 모든 종류의 인간 단체의 궁극적인 의의가 경험의 질의 개선에 기여하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가장 쉽게 인식하게 되는 것은 미성숙한 사람들을 다루는 과정에서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회조직이 교육적 효과를 지니고 있지만, 이 교육적 효과가 단체의 목적의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은 어른들이 아이들과 교섭할 때이다. 사회가 그 구조나 자원이 복잡해짐에 따라 형식적 또는 의도적인 교육(가르침과 배움)의 필요가 증대한다. 형식화된 교육과 훈련의 범위가 커짐에 따라, 보다 직접적인 교섭을 통해서 얻는 경험과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 사이에 달갑지 않은 간극이 생길 위험이 있다. 과거 수세기 동안 지식과 전문적인 기술의 급격한 성장을 볼 때, 그 위험이 오늘날처럼 컸던 적은 일찌기 없었다. (풀이) 제목에서 &amp;#039;필연성&amp;#039;이란 말은 조금 잘못 되었다. Education As A Necessity of Life -&amp;gt; 이것은 (생물이 아닌) 인간 삶이 유지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서의 교육... 이런 뜻이다. 이홍우의 번역에서 &amp;#039;필연성&amp;#039;이란 의역이 너무 지나치고, 김성숙의 번역은 &amp;quot;생명에 필요한 것으로서의 교육&amp;quot;인데, 이건 완전히 잘못 되었다. life는 생명이 아니라 &amp;#039;삶&amp;#039;으로 옮겨야 한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듀이가 말하는 교육이란, 일반 생명체(동식물)가 아닌 인간 삶에서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의 &amp;#039;life&amp;#039;는 우리말로 ‘삶’과 ‘생명’이라는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제목에서는 (방금 언급했듯이) &amp;#039;생명&amp;#039;이 아니라 &amp;#039;삶&amp;#039;이 맞다. 그러나, 본문에서 life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뜻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그래서 요약문에서 ‘삶’이란 단어는 ‘생명’ 또는 ‘생명체’ 라는 말로 바꿔도 뜻이 통한다. 예를 들면, 첫째 문장을 “존재를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생명(체)의 본질이다”로 읽어도 되는 것이며, 또 그렇게 읽어야만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본문 맨 첫째 문단에서 듀이는 생명체(living thing)와 무생물(ex 돌맹이)의 차이를 “자기갱신(self renewal)의 여부”로 구별하고 있다. 즉, 삶(생명체)의 특징은 “부단한 자기갱신”이란 말로 요약되는 것이다. -&amp;gt; [민주주의와 교육]인데, 왜 책의 첫머리부터 ‘생명체’니 자기갱신이니 하는 말이 나올까? 이 맥락을 분석하는 것은 죤 듀이 철학의 전반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초기 듀이 철학의 토대가 된 두 축은 1)생물학주의 2)헤겔 변증법이다. ‘생물학주의’란 생물학 이론에 근거하여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으로서, 19세기 다윈주의(진화론)의 소산이다. 다윈 이전의 서양철학사는 모든 것을 ‘신’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형이상학적 관념론 일변도였는데, 1859년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이라는 한 권의 책이 이 패러다임을 뒤바꾼 것이다. 죤 듀이는 서양의 정신계에서 지적 동요가 심하게 일고 있었던 바로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으며, 자신이 철학자의 길을 가게 된 계기도 대학 3학년에 토마스 헉슬리의 생리학 강좌를 수강하면서였다고 한다. 철학에 눈을 뜨면서 죤 듀이가 맨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개념은 “상호 작용 하는 유기체(interacting organism)”인데, ‘유기체’라는 것이 생물학과 관계있고, ‘상호작용’이라는 개념이 헤겔 변증법과 연결되는 것으로 간단히 이해된다. 죤 듀이의 교육철학 전반에서 변증법적 의미가 풍부히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듀이가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절대정신의 개념 따위)을 수용한 것은 아니라는 것도 일러둔다. 물론, 그렇다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신봉한 것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듀이의 사상은 매우 독창적이다. 나중에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듀이의 교육사상을 비판적으로 음미해보기로 하자. &amp;lt;- 위와 같은 맥락을 짚고 나서 &amp;lt;요약문&amp;gt;의 다음 문장을 읽으면 쉽게 이해가 된다. 즉, 무생물인 돌맹이는 외부 환경(본문에서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충격)에 대해 자기갱신을 통해 극복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부숴지고 말지만, 생명체는 자기갱신을 통해 적응해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체 가운데 인간과 보통의 동식물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보통의 생명체는 영양과 생식을 통해서만 자기갱신을 꾀하며 그저 “생물학적 삶”에 그치지만, 인간은 그것외에 “사회적 삶”을 영위하는 바, 이 사회적 삶의 갱신이 바로 교육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제 1장의 핵심 내용이다. - 1장의 핵심 키워드는 ‘(자기)갱신’이다.(김성숙의 번역본에서는 ‘renewal’ 이란 단어를 ‘새롭게 하기’로 번역하고 있음) 계속해서 &amp;lt;요약&amp;gt;의 다음 몇 문장들은 인간집단에서 ‘경험’에 터한 소통을 통해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듀이 특유의 문체나 어법(code)에 익숙해져 있지 않아서 이 말 또한 그 의미가 쉽게 와닿지 않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담론의 대부분은 사실 알고 나면 간단한 내용들이다.) ‘경험’은 세대간에 축적되어 전수된다. 예를 들면, 농사짓는 노하우를 후손들은 선조로부터 배운 뒤에 다시 자기 자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각 세대간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그 노하우가 점점 정교해지는 것이니, 이것이 듀이가 말하는 ‘자기갱신’이다. 그리고 내가 표현한 ‘전수’라는 말이 듀이의 어법으로는 소통(communication, 번역문에서는 ‘의사소통’이라 옮겼지만, 문맥상 보다 넓은 의미의 ‘소통’이 더 적합하다)과 관계있다. 소통이 교육이라면, 그것은 성인이 아이에게 가르침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수평적인 관계, 즉 집단 구성원 사이에서도 이루어지니 이것이 우리가 보통으로 생각하는 ‘소통’의 개념이다. 그런데 듀이는 수평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소통’도 교육이라 생각하는 것이 주목을 끈다. 그리고 소통의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는(modify) 것이다. &amp;lt;요약&amp;gt;에서 “의사소통은 그것에 참여하는 쌍방의 성향에 수정을 가한다(modify)”는 말이 이런 뜻이다. 아무튼, 인간 삶은 경험과 소통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갱신을 해가며, 수직적으로든 수평적으로든 이루어지는 모든 소통은 곧 교육이다. “사회생활이 바로 의사소통과 동일할 뿐만 아니라, 모든 소통은(따라서 모든 사회생활)은 교육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이홍우 역, p.16 ; 김성숙 역, p.15, 셋째문단, 괄호는 듀이. 이 훌륭한 말은 듀이의 교육철학의 한 중심개념인 “삶이 곧 교육이다”라는 말을 떠올린다. 지금은 무가치한 것으로 폐기처분된 ‘생활중심교육과정’이 죤 듀이의 이 개념을 토대로 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미친 교육’에서 삶은 없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공부를 쉽고 재밌게 할 수가 없다. 쓸데없이 어렵게 공부하며 그것을 잘 버텨내는 “오직” 끈기있는 아이가 “지적으로 유능한 아이”로 인정받는다. 그 다음 두 문장은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 어려운 듯하지만, 간단히 “교육은 백년지대계” 또는 “어린이는 미래의 주역”이라는 논지로 요약된다. 현세대의 경험에서 축적한 노하우를 후손들에게 잘 전수하고 그렇게 잘 교육받아 똑똑해진 후손들이 선조의 노하우를 확대재생산 시켜야 그 집단(부족사회나 국가)이 부흥한다는 것이다. 번역문에서 ‘교섭’은 영어로 ‘association’인데, 이것은 앞의 ‘소통’이란 말과 거의 동어의로 쓰이고 있다. 이홍우선생의 번역이 짜증나는 것이 이런 부분이다. ‘교섭’이라 하면 무슨 ‘단체교섭’이란 의미를 연상시키는데, 현대인 가운데 교섭이라는 낱말을 &amp;#039;관계맺음&amp;#039; 또는 &amp;#039;소통&amp;#039;이란 뜻으로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될 지? 이제 세 문장이 남았다. 이 부분은 쉽게 읽힐 것이다. 대학교 때 교육학 교양과정에서 배웠던, ‘비형식적 교육’과 ‘형식적 교육’의 개념을 다루고 있다. 인간 역사에서 봉건사회까지만 하더라도 교육은 생활 속에서 저절로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논에 물 대는 것이나 새끼 꼬기 같은 것을 아이들이 무슨 연수원에서 배운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비형식적 교육이다. 반면, ‘형식적 교육’의 대표적인 예는 ‘학교교육’이다. 그런데, 인간 삶이 복잡해지고 사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형식적 교육이 비형식적 교육을 대체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은 교육적으로(교육철학적으로) 매우 큰 위험이 있다는 것을 듀이가 적고 있다. 그것은 여러 각도에서 논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이 글의 맥락과 관련해서는...... 교육이 삶에서 분리되는 위험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듀이가 말하는 ‘간극’이라는 것이 이 분리를 뜻할 것이다. &lt;p&gt;&lt;strong&gt;&lt;a href=&quot;http://www.postedu.net/24&quot;&gt;글 전체보기&lt;/a&gt;&lt;/strong&gt;&lt;/p&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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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제4차 독회 : 센코노믹스를 읽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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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2-19T10:07:35+09:00</updated>
  <published>2009-12-19T10:07:35+09:00</published>
  <summary type="html"> 너무 늦게 글을 올려 죄송합니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더 죄송합니다. 아무튼 시작이 중요하다는 것에 의의를 두면서 센코노믹스를 읽으면서 메모한 내용과 지난 달 독회에서 논의했던 주제만 올립니다. 원래 계획은 논의된 주제들을 정리해서 올리는 것이었지만 게으름과 다른 일때문에 차일 피일 미루다 그냥 제목만 올리기로 했습니다.&lt;p&gt;&lt;strong&gt;&lt;a href=&quot;http://www.postedu.net/25&quot;&gt;글 전체보기&lt;/a&gt;&lt;/strong&gt;&lt;/p&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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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죤 듀이, [민주주의와 교육] - 목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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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2-01T22:06:32+09:00</updated>
  <published>2009-12-01T22:06:10+09:00</published>
  <summary type="html"> 죤 듀이, [민주주의와 교육] - 목차 1. 생명에 필요한 것으로서의 교육 (Education As A Necessity of Life) 2. 사회 기능으로서의 교육 (Education As A Social Function) 3. 지도로서의 교육 (Education As Direction) 4. 성장으로서의 교육 (Education As Growth) 5. 준비, 개발, 정신능력배양 &amp;nbsp;(Preparation, Unfolding, And Formal Discipline) 6. 보수 진보로서의 교육 (Education As Conservative And Progressive) 7. 교육에 대한 민주적인 생각 (The Democratic Conception in Education) 8. 교육의 여러 목적 (Aims in Education) 9. 목적으로서의 자연적 발달과 사회적 유능함 &amp;nbsp;(Natural Development And Social Efficiency As Aims) 10. 흥미와 훈련 (Interest And Discipline) 11. 경험과 생각 (Experience And Thinking) 12. 교육에서의 사고 (Thinking in Education) 13. 교수법의 본질 (The Nature of Method) 14. 교재의 본질 (The Nature of Subject Matter) 15. 교육과정에서의 놀이와 일 (Play And Work in the Curriculum) 16. 지리와 역사의 의의 (The Significance of Geography And History) 17. 교육과정에서의 과학 (Science in the Course of Study) 18. 교육적 가치 (Educational Value) 19. 노동과 여가 (Labor And Leisure) 20. 이론적 학과와 실제적 학과 (Intellectual And Practical Studies) 21. 자연과와 사회과 : 자연주의와 인문주의 &amp;nbsp;(Physical And Social Studies: Naturalism And Humanism) 22. 개인과 세계 (The Individual And the World) 23. 교육의 직업적 측면 (Vocational Aspects of Education) 24. 교육철학 (Philosophy of Education) 25. 인식의 이론 (Theories of Knowledge) 26. 도덕의 이론 (Theories of Morals) &lt;p&gt;&lt;strong&gt;&lt;a href=&quot;http://www.postedu.net/23&quot;&gt;글 전체보기&lt;/a&gt;&lt;/strong&gt;&lt;/p&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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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케세라 세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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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2-04T15:22:58+09:00</updated>
  <published>2009-11-02T09:31:29+09:00</published>
  <summary type="html"> &amp;nbsp; 존경하는 조합원선생님들께. 10월의 마지막 밤입니다.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를 선생님들께 풀어놓을까 생각하다가 지난번처럼 좋은 음악과 함께 그 음악과 관계되는 글을 쓰기로 합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이지만 이용의 노래가 아닌 Doris Day의 [Que Sera Sera]입니다. 제가 이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삼은 것은 오늘 이야기가 ‘우리 아이들의 삶’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년째 이 학교에서 5․6학년 영어전담을 맡고 있는데,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날씨가 더워서인지 수업시간에 조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옆 친구가 내 눈치를 보며 짝꿍을 막 깨우려 하길래 “그냥 나둬라. 잠 오면 자야지” 했습니다. 이 파격적인(?) 나의 배려에 아이들이 맞장구를 치면서 몇몇은 “수업시간에 졸다가 혼난 기억”들을 늘어놓기 시작하는데, 놀라운 것은 “학원에서 졸다가 맞은 아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초등학생을 6교시 까지 학교에서 수업 받게 하는 것도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인데, 그것도 모자라서 대부분의 우리 아이들은 방과 후에 학원 수업 까지 받습니다. 그런데 제 돈 들여 공부 배우러가서 졸았다고 두들겨 맞다니..... 때리는 학원교육 관계자나 또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는 학부모들이나 모두들 참 이상합니다. 웃지 못할 현실은 대도시는 물론 구미같은 중소도시만 하더라도 명문학원 소리 듣는 곳에서는 아이들을 많이 때린다고 하는데 그런 학원일수록 학부모들이 못 보내서 안달이라고 합니다. 학원관계자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학교는 뭐 그리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주나요?” 할 말이 없습니다. 아무튼, 교육에 관한 한 우리는 미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amp;#039;미친&amp;#039;이란 표현이 점잖지 못한 어법이겠으나 앞으로 제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 이 말을 꼭 써야 합니다. 한국사회에서 교육이 현상하는 본질에 대한 적확한 한마디로, &amp;quot;미친 사회, 미친 교육&amp;quot;이란 말 이외의 다른 진술 형태를 생각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一物一語, 한 사물을 정확히 규정하는 표현은 한 낱말밖에 없다 - Flauvert .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학생의 인격을 마구 짓밟는 곳에서 교육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는 뻔합니다. 여기서는 ‘교육’이 아닌 ‘조련’이, 교사와 학생 간의 ‘인간적 만남’이 아닌 ‘상거래 행위’가 있을 뿐입니다. 학습은 학생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발견의 쾌감을 얻게 하는 방식보다는 오직 ‘드릴’로 일관할 것입니다. 이런 학원/학교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떤지 몰라도 학생의 입장에선 두들겨 맞아가면서 재미도 없는 공부를 억지로 하는 것이 즐거울 리가 없겠죠. 초등학생들이 학교에서 학원으로 이어지는 숨 가쁜 일과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정상적인 아이라면 당연히 지루함을 느끼고 한 눈을 판다거나 한두 번 학원숙제를 빼먹기가 일쑤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아이는 이 이상한 교육시스템에서 낙오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 비정상적인 체제에서 살아남는 아이와 학부모는 어떤 자긍심을 가질 것입니다. 요컨대, 전자에겐 무능함의 낙인이, 후자에게는 미래의 성공을 보증하는 첫 번째 ‘좁은문’을 통과했다는 보상심리가 주어질 겁니다. 바로 이러한 속성에 따라 “많이 때릴수록 학부모들이 더 선호하는” 미친 메커니즘이 고착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저 또한 교사인 동시에 아이의 부모이기도 합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이 미친 사회에서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아이 공부’와 관련하여 부모가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죠. 교육전문가인 우리가 볼 때 “저건 아니다”라고 확신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현실적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초등학교 1~2학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문제 같지도 않은 시험지 풀려서 그 점수를 부모님 확인(도장) 맡아오게 하는 따위. 초등교육전문가인 내가 풀어도 80점 이상 못 맞는 이상한 시험을 망쳤다며 울상 짓는 집 아이를 볼 때마다 정말 한숨과 분노가 터져 나옵니다. 가급적 읽기 편하시게 글을 길게 쓰지 않으려 합니다만, 이 사회에서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이 뭘 뜻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습니다. [장학퀴즈]나 [도전골든벨] 같은 TV 프로에서 최종적으로 ‘살아남는’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이던가요? 이를테면 베토벤의 [Moonlight Sonata]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와도 아무도 답을 못합니다. 그러다가 아나운서가, 베토벤... 밤... 어쩌구 하면 벨을 눌러 &amp;#039;월광&amp;#039;이라고 맞힙니다. 나는 이게 원숭이 재주넘기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amp;#039;도스토옙스키&amp;#039; 하면, &amp;#039;죄와 벌&amp;#039;이고, &amp;#039;죄와 벌&amp;#039; 하면 도스토옙스키고...... “한 권의 책”에서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잡다한 책들의 제목과 줄거리 외우기는 것이 학력사회의 피라미드 상층부로 향하는 지름길이 되는 이런 교육풍토가 누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지...... 아이들 죽도록 공부 시켰으면 개인이나 사회의 발전을 위해 뭔가 남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중략 - 우리 아이들, 특히 초등학생들의 신세는 &amp;#039;경주마&amp;#039;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첫째, 말의 자발적인 의지와 필요에 따라서가 아니라 외적 강제에 의해 뜻도 영문도 모르고 목표를 향해 죽도록 달려가야 합니다. 둘째, 경주마의 가치는 오직 성적으로만 가늠됩니다. 인간성(?) 좋은 말도 성적이 좋지 않으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셋째, 말의 본질은 ‘야생마’입니다. 말은 들판을 자유롭게 노닐기 위해 태어났지 경주용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경주용으로 전락하면서 말의 본성에 충실한 자발적 성장은 멈추어 버립니다. 트랙 안에서 달리기만 잘 하는 것은 ‘발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퇴행’이라 일컬어야 합니다. 놀이터와 놀이시간을 빼앗긴 어린 아이는 거세된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학교 공부 마칠 무렵 교문 앞에서 아이들 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노란색 봉고차를 보면서 나는, “저것이 닭장차와 뭐가 다른가?” 생각합니다. 자 그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교사를 떠나 학부모로서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해 제가 고민 끝에 정리한 것을 여러 선생님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교육에 관한 한, 제정신이 아닌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미친 사회, 미친 교육”임을 인정한다면, 결론은 자명해집니다. 물론 저는 그 자명한 결론을 창백한 당위론으로만 포장하지는 않겠습니다. 논리 전개의 편의상, 1)당위 2)현실 3)쟁점사항 4)결론 이러한 포메이션으로 구성하여 (이 글에서는) 그 요지만을 적어봅니다. 1) 당위 : 학부모가 되어서 같이 미쳐갈 수는 없다. 목숨 보다 더 소중한 우리 새끼들을 미치게 만들 수 없다. 2) 현실 : 그 미친 생존경쟁의 대열에 미친 척하고 뛰어 든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인내의 결과로 달콤한 열매를 얻는다는 보장이 없다. 3) 쟁점 : 설령 그 달콤한 열매를 취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amp;quot;인간다운 삶의 행복&amp;quot;을 의미하는가? 이 천민자본주의의 미친 교육시스템 속에서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이 대관절 뭘 의미하는가? 4) 결론 : 공부를 스스로 재미있게 하게 하자. 그리고 공부의 결과에 대해서는 “케세라 세라” 케세라 세라! 당위적으로나 현실적으로도 이것이 유일무이한 해결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amp;nbsp; ‘케세라 세라’는 ‘될 대로 되라’는 뜻이지만, 자유방임형의 정책(?)은 절대 아닙니다. 케세라 세라는 교육이라는 국지적인 영역에 대한 대안이라기보다는 전면적인 대안으로서의 &amp;#039;삶의 패러다임’입니다. 특히 천민자본주의 한국사회에서 만연한 ‘생존경쟁의 패러다임’에 비해 ‘케세라 세라의 패러다임’은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과도 일맥상통하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도리스 데이의 [Que Sera Sera]는 가벼운 왈츠풍의 노래이며 음악성의 깊이도 없지만 노랫말의 이면에는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학생의 날’에 (영어)선생님들께서 아이들에게 이 노래의 뜻을 함께 음미하며 부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공부 못한다는 이유로 주눅 든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리라 생각합니다. &amp;nbsp; When I was just a little girl I asked my mother what will I be. Will I be pretty? Will I be rich? Here is what she say to me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amp;#039;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What will be will be. 내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 이 다음에 내가 뭐가 될까 물었지 미인이 될 수 있을까?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케세라 세라. 뭐든 될 대로 되겠지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란다 케세라 세라. 무엇이 되든 네가 될 대로 될 거야 When I was grew up and fell in love I asked my sweet heart What live&amp;#039;s ahead? Will we have rainbows, day after day? Here&amp;#039;s what my sweetheart said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amp;#039;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What will be will be. 성인이 되어 사랑에 빠졌을 때 나의 연인에게 물었지 우리들의 앞날이 어떠할까? 우리들 삶이 날마다 무지개빛일까? 그 사람이 대답하길 케세라 세라. 뭐든 될 대로 되겠지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란다 케세라 세라 뭐든 될 대로 될 거야 Now, I have children of my own, they asked their mother. What will I be? Will I be handsome, will I be rich? &amp;nbsp;I tell them tenderly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amp;#039;s not ours to see. &amp;nbsp;Que sera sera What will be will be. Que sera sera~! 이젠 나도 어머니가 됐어. 내 아이들이 내게 물어왔지 이 다음에 내가 뭐가 될까요? 미남이 될까요? 부자가 될 수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차분히 일러줬지 케세라 세라. 뭐든 될 대로 될 거야. 미래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란다. 케세라 세라. 뭐든 네가 될 대로 될 거야. 고등학교 동창회 같은 곳에 가보면 학창시절에 “저거 인간 되겠나” 싶었던 아이들이 뜻밖의 모습으로 나타나 친구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또한 공부를 못해서 예상대로(?) 자동차 정비 따위의 일을 하는 친구의 경우도 밝은 표정을 짓는 것으로 미루어 나름 행복한 삶을 살고 있구나 생각게 하기도 합니다. 반면, 무슨 법대/의대를 나와 변호사나 개인병원을 개업했다는 친구들의 경우는 좋은 차를 몰고 다님에도 늘 돈 걱정 하는 모습만을 보여줍니다. 이들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돈자랑 아니면 돈걱정 뿐입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닐뿐더러 자산순도 아닌가 봅니다. 지금 공부를 잘 하든 못 하든, 우리 아이들은 저마다 어떤 모습으로든 미래에 자기 나름의 모습으로 삶을 살아갈 겁니다. 이게 ‘케세라 세라’입니다. “될 대로 되라”하면 우리말 어감상 ‘자유방임’을 연상케 하지만, “What will be will be”란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amp;nbsp; &amp;nbsp; 곧 ‘학생의 날’이 다가오네요. 연중 입시지옥에 신음하는 우리 아이들, 이 날 특별히 더욱 따뜻한 눈길로 아이들을 품으시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긴 글을 맺습니다. &amp;nbsp;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amp;nbsp; &lt;p&gt;&lt;strong&gt;&lt;a href=&quot;http://www.postedu.net/21&quot;&gt;글 전체보기&lt;/a&gt;&lt;/strong&gt;&lt;/p&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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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10월 17일 세미나 후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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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부정변증법</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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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0-20T11:07:05+09:00</updated>
  <published>2009-10-20T11:07:05+09:00</published>
  <summary type="html">10월 17일 우리 모임의 정기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보울즈 등이 지은 &amp;#039;자본주의 이해하기&amp;#039;의 세번째 부분인, 거시경제 부분을 읽고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이 책은 다른 경제학 교과서와 달리 거시경제 부분에서 중요한 주제로 빈곤과 불평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빈곤과 불평등이 경제 체제 전체에 대해 주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상세한 데이터를 제시하고 있으며, 이 불평등이 다만 소득의 불평등 뿐 아니라 민족, 인족, 성별등 다양한 불평등과 상호작용하고 있는 현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 책의 시종일관한 주제인 &amp;quot;누가 어떤 방식으로 잉여생산물을 가져가는가?&amp;quot;의 문제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논지를 모았습니다. 즉 자본주의에서 자본,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이 모든 잉여생산물을 독점하고 노동자는 다만 자기 재생산이나 겨우 할 정도의 분배를 받는다는 것, 따라서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이런 상대적 불평등의 누적이 자본주의적 분배방식의 정당성 철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업과 인플레이션을 이 지점에서 정치적으로 해석한 부분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자본주의적 분배방식의 정당성 철회를 막기 위해 노동자들은 사실상 끊임없이 노동할 수 밖에 없도록 강제되어야 하며, 실업은 그 강력한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필립스 곡선은 대단히 중요한 계급갈등을 표현하고 있는 셈입니다.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이 부적 상관관계라는 것, 그리고 어느 정도 높은 실업률은 자본가의 강력한 노동강제 수단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인플레이션 율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하는(즉 실업률을 높이라는) 통화주의가 어째서 자본가의 이데올로기이며 신자유주의의 핵심인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논의에 대해 압구정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그쪽 아이들의 입장에 서서 가상의 반론을 제시하셨고, 거기에 대한 재반론이 이어지면서 흥미로운 토론이 계속되었습니다. 다음 달 모임은 11월 21일에 하기로 하였으며, 1)도덕론자로서의 아담 스미스 다시 읽기 2)정보, 통신, 신경제 시대의 노동 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장기 과제로 제출하였습니다. &lt;p&gt;&lt;strong&gt;&lt;a href=&quot;http://www.postedu.net/19&quot;&gt;글 전체보기&lt;/a&gt;&lt;/strong&gt;&lt;/p&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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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샌 프란시스코... 히피를 아시나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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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필인</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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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0-19T19:36:22+09:00</updated>
  <published>2009-10-19T13:46:49+09:00</published>
  <summary type="html"> 스콧 맥켄지(Scott McKenzie)의 아름다운 노래 [San Francisco]. 팝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이 노래만큼은 잘 알 것이다. 예전에 TV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애인]이라는 연속극에 삽입되어 뒤늦게 국내 음반계에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왔던 음악이기 때문이다. 아마 [애인]은 이른바 불륜을 소재로 한 최초의 연속으로서 당시 안방극장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극중에서 두 주인공(황신혜, 유동근 분)이 만나는 장면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 노래가 그렇고 그런 사랑타령을 주제로 한 팝음악인 줄로 알지만 노랫말이나 이 노래가 생겨난 배경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노래의 원제목은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Some Flowers]인데, 샌프란시스코에 갈 때면, 왜 꽃을 머리에 달라는 지가 궁금해진다. 사실, 이 꽃 이야기는 팝 음악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위의 노래가 발표된 시기는 1960년대 말이었다. 이 시기는 마르틴 루터 킹이나 말콤 X를 필두로 한 흑인 민권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으며, 미국이 명분 없이 개입한 베트남전쟁 때문에 젊은이들 사이에서 기성세대에 대한 강한 불신과 반항심이 고조되고 있던 때였다. 청년들의 이유 있는 반항은 학생운동과 히피즘으로 표출되는데, 학생운동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위치한 버클리대학이다.1) 그리고 통기타, 청바지, 장발 그리고 오토바이 질주로 대변되는 히피즘(hippism)도 샌프란시스코의 헤이트 애쉬베리(Haight-Ashbury)에서 생겨났다. 애쉬베리는 일종의 슬럼지구로서, 당시 젊은이들이 그들의 고뇌를 예술로 표현하기 위해 창작활동에 몰두하던 곳을 말한다. 올리버 스톤의 영화 [도어즈]에서 짐 모리슨(발 킬머 분)이 여자 친구(멕 라이언 분)를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장소가 바로 헤이트 애쉬베리이다. 히피(hippie)하면 보통 광란의 오토바이 폭주족(Easy Rider2))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들은 퇴색된 의미에서의 사이비 히피들일 뿐, 진정한 히피들은 나름대로 고상한 신념체계를 지니고 있었다. &amp;nbsp; 1967년 1월, 샌프란시스코의 골든게이트공원에서 “사랑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이 모여 일종의 궐기대회를 열었는데 이 순진무구한 청년들이 다름 아닌 히피들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여의도광장에 모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던 것처럼 이들은 [San Francisco]를 불렀다. 즉 이 글에서 소개하는 노래는 히피들의 집회에서 로고송이었던 것이다. 가사 내용이 전체적으로 그러하다. 당대의 &amp;#039;샌프란시스코&amp;#039;라는 지역은 히피즘의 메카이자 히피들의 꼬뮨이었는데, 이 노래의 내용은 천편일률적인 사랑타령과 전혀 거리가 먼 것으로서, 너도 나도 꽃을 머리에 달고서 &amp;quot;함께 연대해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자&amp;quot;는 호소문인 것이다. 히피들은 현대인들이 중요시 여기는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성공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 대신, 사랑과 화평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합치를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한다. 이들 신념의 밑바탕에는 동양의 선(禪)사상, 특히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1970년 비틀즈가 발표한 [Let It Be]의 가사내용에서도 엿볼 수 있는 바, 히피즘이 당대 청년문화에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3). 꽃은 히피들의 해맑은 신념을 상징한다. 히피들의 집회인 러브인(love-in)에 참가하는 모든 이들은 반드시 머리에 꽃을 달고(some flowers in your hair) 와야만 했다. 심지어 집회를 감시하는 경찰들도 그 분위기에 압도당하여 헬멧에 꽃을 달았을 정도라고 하니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히피즘이 기성 문화에 대한 반문화(counter-culture)의 형태로 생겨났음을 생각할 때, 꽃은 총에 대한 대립물로서 일종의 ‘무언의 저항’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히피즘은 피부색을 초월한 인간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간의 주류 문화들이 한결같이 서구중심적(이른바, 문명)이었음에 비해 히피즘은 아프리카의 부두교(이른바, 야만)와도 손을 잡는다. 히피들이 베트남전을 반대했던 것도 이러한 코스모폴리터니즘과 상관있을 것이다. 총을 버리고 꽃을 머리에 꽂아 반전과 평화를 부르짖은 히피들의 의거를 세인들은 &amp;#039;플라워 무브먼트(flower movement)’라 일컬었으며, ‘꽃의 아이들(flower children)’은 히피들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풍문과는 달리 히피들이 매우 건강한 청년들이었다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플라워 무브먼트는 록음악과 결합하여 찬란한 꽃의 문화를 양산하였는데, 그 중 일부는 지금도 팝 역사에 전설로 남아 있다. 1967년, 몬트레이(Montrey)에서 시작된 팝 페스티벌은 우드스탁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세간엔 ‘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festival)’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이 행사가 벌어진 장소는 우드스탁으로부터 약 50마일이 떨어진 한 낙농업자 소유의 개인 농장이었다. 당국으로부터 장소 사용 허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한 장면 : 등을 보이고 있는 왼손잡이 기타리스트는 지미 헨드릭스이다 1969년 8월 15일, 50만 명의 젊은이들은 사흘간의 밤낮을 비탈진 언덕에서 보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공연기간 내내 비가 내려 청중들이 앉아서 먹고 자는 땅바닥은 온통 수렁으로 변했다. 뿐만 아니라, 페스티벌 참가자들이 타고 온 차량행렬이 수십 마일의 도로를 점거한 탓에 외부에서의 식료품 공급이 불가능했으며, 턱없이 부족하고 불편한 위생시설 등은 극도의 무질서와 혼란을 야기하기에 충분했다. 시간당 수십 건의 살인과 강간이 자행되는 나라에서 50만의 젊은이들이 인간으로선 견디기 힘든 악조건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록 사운드와 마리화나에 취해 거침없는 표현과 과감한 노출을 일삼는 이 위험천만한 젊은이들이 모인 목장이 곧 아수라장으로 변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그러한 우려와는 달리, 젊음의 발산은 80년대 록그룹의 이름처럼 ‘평온한 폭동(Quiet Riot)’으로 결말을 맺었다. 사랑의 힘을 믿는 온화한 기질의 소유자들(gentle people, 이 노랫말의 주요 키워드 중의 하나)은 그들 머리에 단 꽃의 영예를 욕되게 하는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았다. 히피들은 헤이트-애쉬베리란 ‘꼬뮨’에서 단련한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불편함을 서로 나눌 줄 알았던 것이다. ‘우드스탁’은 신화로 남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으며, 또 이것은 청년 문화의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리하면,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의 시대상황은 젊은이들에게 허무 그 자체였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반항이 허무와 광기로 그치고 만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대중음악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 형태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그 꽃밭은 다름 아닌 샌프란시스코였던 것이다. 이젠 왜 꽃을 머리에 달고 샌프란시스코에 가야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렸을 것이다. 한편, 샌프란시스코에서 개화한 &amp;#039;꽃의 문화&amp;#039;는 태평양을 건너 동토의 한반도에도 싹을 틔웠다. 당시 한국은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가 &amp;#039;유신&amp;#039;이란 가당찮은 논리로 종신집권을 획책할 때였다. 이 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탁월한 매판적 역량을 인정받아 만주에서 독립군 토벌대(관동군: 일제의 정예부대)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기도 하다.4) 구린 과거를 지녔기에 이 자는 모든 국민들에게 입을 다물게 했다. 말 많은 사람은 빨갱이로 몰아, 어떤 이(장준하: 자신의 과거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는 산에서 실족케 하였고, 또 어떤 이는 바다에 빠뜨리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amp;#039;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amp;#039;란 이상한 이름의 파쇼적 억압은 정치면에서 그치지 않고 문화의 꽃밭에도 강력한 제초제를 치기 시작했다. &amp;#039;한국적 문화대혁명&amp;#039;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당시 가장 바빴던 사람은 경찰들이었다. 그 시대의 경찰은 도둑놈 잡으랴, 데모 진압하랴, 그리고 30센티미터 자를 들고 다니며, 거리에 머리카락이 길거나 치마가 짧은 성인남녀를 찾으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시의 한국은 문화인류학자들이 연구대상으로 삼을 만한 신비의 나라였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문화는 항상 기성세대의 권위에 대한 반항을 통해 다져지고 발전하는 법이다.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그리고 한국대중음악의 대부인 신중현, 이들은 한국형 &amp;#039;꽃의 아이들&amp;#039;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암울한 시대에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대중음악의 꽃을 피웠다. &amp;quot;청년이 침묵하는 곳에, 사회의 진보는 없다&amp;quot; 마르쿠제의 영향을 받아, 노동계급이 아닌 청년학도들이 질풍노도처럼 사회의 진보를 이끌었던 그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혹자들은 묻는다. Where Have All the Flower Children Gone? &amp;#039;꽃의 아이들&amp;#039;은 죄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70년대초를 기점으로 미국사회에서 히피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닉슨 정부를 굴복시켜 베트남전을 종전케 한 미국 청년들의 위대한 몸부림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었는가? 이러한 사정은 한국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6.3에서 시작하여 5.18과 6월 항쟁을 이끈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한국의 학생운동이건만, 요즘은 대학가에서 데모하는 대학생을 찾아보기 힘들다. 청년이 침묵하는 곳에 사회의 진보는 요원하련만... 1)60년대말 학생운동은 유럽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가 대표적인데, 이들은 사상적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 특히 마르쿠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네오맑시스트인 마르쿠제는 노동계급이 아닌 인텔리겐차(대학생)과 룸펜프롤레타리아트들이 사회변혁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류역사에서 진보의 굵직한 획을 그은 특별한 해가 있는데 1789나 1917 못지않게 1968이란 숫자가 그러하다. 맑시스트 학자 크리스 하먼이 지은 [세계를 뒤흔든 1986, 책갈피, 2004]은 1960년대말 유럽 청년의 저항사를 잘 서술한 책인데, 저자는 책 머리말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때때로 한 세대 전체를 마법에 빠뜨리는 특별한 해가 있다. 이런 시기는 나중에 그 해를 단순히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의 마음 속에 수많은 상념이 떠오르게 한다. 1968년이 바로 그런 해였다.” &amp;nbsp; &amp;nbsp; 2)데니스 호퍼(Dennis Hopper)가 감독 및 주연을 맡은 훌륭한 영화 [이지 라이더] 또한 히피 시대 청년들의 초상을 관람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영화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amp;nbsp; 3) 레넌이 시(가사)를 쓰고 메카트니가 선율을 매긴 것에 필 스펙터(Phil Spector)라는 명 프로듀서가 손질을 하여 완성된 이 아름다운 곡은 제목부터 ‘無爲’란 한자어를 그대로 영어로(Let It Be) 옮기려 애쓴 듯하다. 전체 가사 내용 또한 영국인 고유의 카톨릭 신앙에 노자를 접목시켜 시종 막연한 낙천주의를 설파하고 있다. &amp;nbsp; 4) 그렇다고 이 자의 두뇌가 명석했다고 생각하지는 말라. 대구사범학교 시절 이 자의 반 성적을 보면 45명 가운데 줄곧 꼴찌에서 1-2등을 맴돌았다. &amp;#039;사람 죽이기&amp;#039; 공부에는 우등생이었고, &amp;#039;사람 살리기(敎育)&amp;#039; 공부에는 도무지 취미와 적성이 맞지 않는 부적응아였던 모양이다. &amp;nbsp; &lt;p&gt;&lt;strong&gt;&lt;a href=&quot;http://www.postedu.net/18&quot;&gt;글 전체보기&lt;/a&gt;&lt;/strong&gt;&lt;/p&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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