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발제===
제1편 교육의 본질과 역할
1. 교육의 정의에 대한 비판적 고찰
뒤르켐은 우선 교육에 대한 기존의 정의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논문을 시작한다.
밀은 교육을 "우리 본성을 완전하게 만들 목적으로 취하는 모든 행동"으로 정의했다. 뒤르켐은 이 정의는 너무 넓고, 심지어 타인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이라면 뭐든지 교육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혼란을 야기한다고 비판한다.
칸트는 "각 객인의 목적을 가능한 한 완전하게 개발하는 것, 즉, 인간의 모든 능력을 조화롭게 계발하는 것"을 교육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뒤르켐은 이는 사회분업을 무시한 개인주의적 관점이라고 비판한다. 현대사회는 고도로 분업화되어 있으며, 모든 인간이 모든 능력을 계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래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분업화된 사회에서는 특정 분야에만 정통해도 되며,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공통적 기반을 상실한다고 볼수 없다.
그 외에 공리주의와 스펜서도 비판적으로 검토한 뒤 뒤르켐은 선배들의 공통의 결함이 이상적이고 완전한 교육의 실체를 가정한 데 있다고 결론내린다. 즉 모두에게 타당한 보편적인 교육의 상 같은 것이 있을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훌륭한 교육이 로마시대에는 나라 망칠 교육이며, 반대로 고대의 위대한 교육은 오늘날 전체주의 교육으로 질타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교육은 역사적으로 부단히 변화할수 밖에 없으며, 그 중 하나만 완전하고 나머지는 다 오류라고 볼수 없는 것이다. 교육은 이상이 아니라 제도이며, 따라서 사회구조의 반영이다. 따라서 각 시대마다 그 시대와 사회에 가장 적합한 교육제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마치 논리적으로 구상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면 앞서와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 정당, 정치기구, 과학의 발달수준, 산업발달수준과 교육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과 분리되면 교육체제는 이해불가능하다. 따라서 교육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는 이 체제와 제도를 역사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이런 연구 결과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불변하는 몇몇 요소들을 추출할수 있으며, 이를 통해 교육의 예비적 개념을 정립해서 이론적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2. 교육의 정의
역사적 고찰의 결과 뒤르켐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찾는다.
1)교육은 세대간에 이루어진다. 2)교육은 성인이 아동, 청소년 세대에게 영향을 주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영향이 어떤 종류이며, 어떤 식으로 주어지는가가 바로 그 사회의 성격과 연결된다.
또한 역사적 경향 속에서 뒤르켐은 교육이 점점 다양화 전문화 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심지어 완전평등사회라도 직업의 분화가 교육의 다양성을 초래한다. 절대적인 동등성, 동등한 교육은 선사시대에나 가능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교육은 각 사회분업에 적합한 영역별 전문교육의 분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나 전문교육들에도 공통의 기반이 있다. 그것은 계층 직업을 불문하고 가르쳐야할 공통의 사상, 정서, 관습이다. 모든 사회는 그 나름의 이상적인 인간상과 의무를 지덕체 측면에서 설정하기 마련이며, 이것은 특히 종교가 기반을 상실한 근대사회에서는 결정적인 사회통합 기제다.
따라서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교육의 기능은
1) 사회가 구성원에세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신체, 정신적 제 기능의 육성과 계발, 2)특정 사회집단(분업에 의한)에서 공통적인 여러 기능의 계발(전문교육) 이 두가지다.
이 둘은 사회의 역동을 보여주는데, 사회는 어느정도 동질성을 가져야 유지된다. 그러나 다양성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사회통합과 분업, 이 둘은 모두 중요한 과제며, 이는 교육에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치 한국교육과정의 국민공통과정과 전문심화과정과도 같이.
이리하여 뒤르켐은 교육을 정의하기를 "교육은 아직 사회생활의 준비가 되지 않은 어린 세대들에 대한 영향력 행사로, 그 목적은 전체 사회로서의 정치사회와 그가 종사해야 할 특수환경 양편에서 요구하는 지덕체 특성의 육성과 계발이다."
3. 정의의 적용: 교육의 사회적 성격
교육은 어린세대 사회화를 위한 여러 방법으로 구성되는데, 바로 이들을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 형성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사회적 존재는 인간이 타고나는 소질이 아니며, 자연적으로 발달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는 새 세대가 등장할때마다 자신을 새겨넣어야 할 백지에 직면한다. 교육은 타고난 소질을 계발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생활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과학적, 성찰적 사고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속에서 기능수행이 어려워진다. 따라서 과학 학습이 의무로 요구된다.마찬가지로 문화, 체육 조차도 이런 사회에서의 기능수행을 위해 요구되며, 따라서 교육된다.
그렇다면 개인을 사회라는 폭군의 압제에 적응시키는 것이 교육인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 안에 살기 때문에 인간이다. 도덕은 개인의 실천이성이 아니라 공동생활에서 연유되는 것이며, 지식 역시 사회적으로 형성된 기본개념, 방법론 등에 의존한다. 만약 사회에서 얻은 것을 제거한다면 인간은 동물이 되고 만들것이다. 따라서 교육은 억압이 아니라 도리어 개체를 성장하도록 도와주고 참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4. 교육과 국가의 역할
따라서 교육은 가정의 소관사항이 아니다. 교육은 사적과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는 교육에서 소극적 행위자일수 없다. 교육의 방향을 지시하는 근거다. 아동이 사회에 적응하도록 부과될 사고, 정서의 내용을 교사에게 제공, 상기시켜 주는 것은 국가의 임무다. 만약 교육적 영향의 사회적인 방법의 시행을 보증하지 못한다면, 교육은 사적 신념의 시녀가 되고 말며, 이는 교육의 기본목적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국가의 수업독점을 의미하지 않는다. 학문의 진보는 개인의 창의가 허용되어야 빠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의 다양성은 보장하데, 그 면허권은 국가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국가는 까다롭고 신중하게 교육에 관여한다.
따라서 사상, 감정의 공동체를 국가가 억지로 만드는 것은 불가하다. 국가는 다양한 의견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기저에 있는 공통성 즉, 이성의 존중, 과학의 존중, 민주적 도덕의 기초를 이루는 사상과 감정의 존중 등을 바탕으로 교육의 대강을 규정하고, 그것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을 역할로 삼아야 한다. 국가의 영향력은 덜 공격적이고, 한계내에서 현명하게 행사해야 실질적인 효력을 볼 것이다.
5. 교육력과 교육방법
개인은 어느정도의 기질적 차이는 타고난다. 그러나 그것을 구체적인 결과로 만드는 것은 교육의 영향력이다. 같은 공격적 기질을 타고난 아동도 교육의 결과에 따라 범죄자가 될수도 개혁가가 될수도 있다. 즉 소질과 사회적인 역할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으며, 이 거리를 교육이 아동에게 인도해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한 적절한 수단은 교사와 아동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아동은 암시받기 쉬운 자연스러운 수동성의 상태에 있으며, 교사는 우월한 위치에서 아동에게 힘을 미칠수 있다. 교사나 부모의 모든 행위나 사태는 반드시 아동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며, 순간순간의 수많은 무의식적 영향을 남긴다.
따라서 교육은 즉각, 순간적, 분명한 성공을 추구하거나 여기 따라 일희일비하면 안되며, 일관성을 갖고 꾸준히 계속되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교사의 권위다. 교사의 권위는 아동의 수용성에 작용하는 우월한 힘(교육력)의 가장 중요한 근원이다. 교사는 아동이 장차 살아가야 할 사회에서 직면할 의지, 의무의 화신이라야 한다. 따라서 교사의 권위는 순전히 도덕적 우월에서 비롯된 것이라야 한다.
이 도덕적 권위는 교사가 의지력을 가지고, 자신의 기능과 직무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을때 비로소 구성된다. 따라서 교사의 권위는 자유와 배타적이지 않다. 교사의 권위는 의무와 이성이 가진 권위의 한 측면이다. 아동은 이런 권위의 우월성에 복종하도록 훈련받아야 하며, 그래야 장차 양심적으로 발견한 권위도 존중하게 될 것이다.

우리 모임에서 가장 먼저 읽었던 책입니다. 이 책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감상을 올려 봅니다. 다른 회원님들도 이 책에 대해 하실 말씀 있으면 글을 올리시던가 트랙백 달아 주세요^^
===이하 논평==
우선 이 책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주지의 사실이지만 근대 교육학의 효시는 코메니우스지만, 그 속에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갈등을 간파하고 그 화해를 꾀한 최초의 종합자는 루소다. 루소는 "개인적 자유를 신장하는 교육방법"을 통해 "공동체의 시민을 양성하는" 모순적 목표를 놓고 골몰했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 속에 개인적 자유의 교육, 즉 인간으로서 완성되는 교육이 곧 공동체 구성원, 즉 시민으로서 완성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그의 교육은 도리어 잘못된 공동체와 그 문화로부터 아동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보호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이를 자연주의 교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루소의 교육방법은 큰 문제에 봉착했는데, 그것은 1:1 교육이며 10여년을 함께 지내는 멘토에 의한 교육이라는 것이다. 이래서는 현실적인 적용이 어렵다. 루소의 영향력을 크게 받은 손꼽히는 두 사람, 루소의 두 제자라고 불리는(실상 루소는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던) 페스탈로치와 칸트는 공히 이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두 사람은 거의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데, 한 번에 여러명을 모아놓고 하는 공식적인 교육을 통해서도 루소가 꾀했던 인간으로서 완성됨으로써 시민으로서 완성되는 그런 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페스탈로치는 이를 실천으로, 그리고 그가 세운 위페르돈 학교로, 또 그의 영향을 받은 데싸우 학교로 보여주었고, 칸트는 이를 이론적으로 정당화 했다(비록 둘은 만난 적 없지만). 바로 이것이 이책을 읽는 이유다. 근대 공교육의 시작점에서 최초로 그 내적 모순과 긴장을 통합하려한 이론적인 시도라는 것이다. (루소의 에밀은 소설 형식이고, 페스탈로치의 저작은 죄다 수기 형식이라....)
그런데 이 책의 특징은 방대한 서론에 있다. 사실상 서론에서 할 말을 다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바쁜 사람은 서론만 제대로 이해해도 충분하다. 본론에 나오는 각종 상세한 각론들은 사실상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낡거나 틀린것이 많다.
칸트는 루소의 두 가지 교육목표에 대한 고민을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다른 방식의 교육 및 교육기관을 제시함으로써 넘어서고 있다. 즉, 자연적인 교육/ 실천적인 교육, 사교육/ 공교육이 그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같은 책에서 교육에 대한 분류를 매우 다양한 차원에서 시도하여 혼동을 일으킨다. 이건 차차 살펴보기로 하자.
서론에서 제일 먼저 분류한 교육은 양육, 훈육, 교수다.
1. 양육은 자신의 능력을 해가되지 않게 쓰도록 보살피는 것으로 유아기때 행해진다.
2. 훈육은 기율과 규율을 익힘으로써 본능을 억제하는 훈련을 함으로써 장차 스스로 이성적 판단에 의해 본능을 조절할 준비를 갖추는 것으로 아동기에 행해진다. 훈육을 받음으로써 인간은 동물적 본성과 충동의 지배 받지 않고 인간성을 지킬수 있다. 그러나 훈육 단계에서 아동은 어떤 행동을 해야하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알게되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를 법칙에 의거해 인식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양육과 훈육은 주로 억제하는 것으로서 소극적 교육이라고 분류되기도 한다.
그런데 다시 칸트는 양육/교육 의 분류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교육에는 훈육과 교수가 포함된다.
3 교수는 다시 지식교육과 도덕교육으로 나뉜다. 여기에서 칸트는 교육의 목적에 대해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인류의 완전성을 고취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받은 소명에 대한 개념적 지식을 갖추어야 하며(지식교육), 선으로 향하고자 하는 성향을 계발해야 한다(도덕교육).
칸트는 교육이란 바로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종의 기예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인간의 본성을 충분히 성취시키는 방향으로 타고난 소질을 계발하는 기예다. 따라서 이는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방식의 모방학습으로는 불가하며 반드시 의도적인 탐구, 연구의 양상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육은 당장 투입된 예산의 효과에 대한 당장의 결과를 확인하기 곤란한 영역이므로 국가가 직접 관여하거나, 부모에게 마냥 맡길 것이 아니라 의식이 충분히 계몽된 전문가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이 실현되고 완성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에서 칸트는 교육의 일반적인 네가지 목표를 상세히 제시힌다.
1) 야만성, 동물성을 버리고 충동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훈육이 담당)
2) 문화화 되어야 한다. 즉 신체와 마음의 능력을 기르고 키워야 한다.
3) 문명화 되어야 한다. 즉, 처세, 사교술, 실용적 분별력, 사회생활 요령등이 있어야 한다.
4) 도덕화되어야 한다. 즉 보편적인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마음씨를 길러야 한다.
1)의 결과 아동은 한 개인으로 완성되며, 2),3)의 결과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 완성되며, 4)의 결과 인류사회의 구성원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각 연령별로 잘 배분되면, 루소가 고민한 한 인간으로서의 완성과 시민으로서의 완성은 동의어가 된다. 그러나 현재 교육은 2),3)에 너무 치중하여 4)가 너무 등한시되고 있다는 탄식도 빼놓지 않는다.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이 네가지중 하나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물론 이는 모든 인간이 보편적인 실천이성, 즉 선험적인 도덕법칙을 가지고 있다는 칸트의 윤리학이 지탱될 때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런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교육방법의 측면에서 칸트는 이루어지는 장소에 따라 사교육/공교육, 그리고 주로 사용되는 방법에 따라 기계적 규제와 도덕적 규제로 나눈다. 사교육은 우리나라에서 쓰는 의미와 달리 가정교육, 기타 면식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교육을 말한다. 공교육은 공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인데, 칸트는 공교육기관인 학교를 지식교수활동과 도덕교육활동의 기관으로 못박고 있다. 즉 훈육의 단계까지 마친 아동을 가정으로부터 인수받아 시민과 인류로 완성시키는 곳이 학교인 것이다. 이때 칸트는 공교육이 사교육보다 보편타당성의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더 우월한 방법으로 보고 있다. 사교육은 한 가정 안에서 발생한 오류와 실수가 계속 세대를 통해 이어질수 있기 때문이다.
기계적 규제는 아동들이 반복에 의해 습관화되어 따르게 만드는 방식이다. 즉 순종과 복종에 의해 행동한다. 도덕적 교제는 아동들이 일정한 행위법칙에 따라 자유를 향유하는 것이다. 똑 같이 규칙을 따르더라도 전자는 따르도록 지시되어 있으니까 따르며, 후자의 경우는 그것이 타당함을 알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다. 이는 선의지를 결국 실천이성의 명령으로 본 주지적인 칸트의 윤리학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칸트는 자신의 윤리학에서 직면한 딜레마와 다시 만나게 된다. 그것은 행위규칙, 행위법칙이 가하는 규제와 구속을 자유의 능력과 어떻게 조화시킬것인가 하는 것이다. 결론은 그의 윤리학과 마찬가지로 규제와 구속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어디까지나 자유의지에 의해 스스로 복종함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칸트는 이것을 자유와 규율의 합성어인 자율로 부르고 있다. 교육에서 이것은 어떻게 나타날까? 학생들이 규제와 구속에 익숙해야 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 향유할수 있도록 지도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개판과 기계적 복종 사이에 길이 있는 것이다.
물론 칸트는 이 모순적 목표가 동시에 달성된다고 보지 않았다. 앞에서 보았지만, 가정과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에서 충분히 훈육된 다음(규제, 구속이 우선), 10세 이후부터 그 규제 구속의 이유를 이성적으로 추론하는 교육이 이루어짐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를 칸트는 어릴때부터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 반드시 타인의 저항에 부딪침에 익숙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좀 더 나이를 먹으면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기에 서로 상대의 저항이 될 수 있음을 터득하고, 타인의 목적 성취를 허용할때 자신의 목적도 성취할 수 있음을 터득하도록 하라고 제안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될때, 이것이 인격교육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런데, 어릴때 타인의 저항을 경험하지 못한 귀족, 왕족 자제들은 결국 훈육이 제대로 되지 못해 이후 교육도 잘 안되어, 나이를 먹어도 어린아이나 마찬가지라고 개탄한다. 바로 이 점에서 칸트는 공교육을 강조한다. 신분귀천 무관하게 보편적인 훈육과 교육을 받아야 이런 폐단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여러 아동들이 공동생활을 함으로써 저절로 타인의 저항, 제한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는 법을 익힐수 있으니, 미래 시민을 기르는 가장 모범적인 교육방식이라는 것이다. 이게 뭔소리인가 하겠지만, 당시에는 "학교"라는 교육기관이 상당히 실험적인 모델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그런데, 18세기 칸트의 눈에도 한국의 교육은 낙후되고, 목적이 전치된 타락한 모습일테니 참으로 한심한 상황이 아닐수 없다. 칸트가 제시한 목표 네가지중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고, 기계적 방식만 행해지며, 도덕적 규제는 언감생심인 상황. 학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인류의 구성원은 커녕 한국의 구성원으로도 생각안하는 지독한 이기주의. 즉 칸트의 말을 빌리면 아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이만 먹은 어른들이 다시 자기 아이를 키우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가정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권위가 이양된 공교육을 제안한 것인데, 저 아동같은 학부모가 여전히 입김을 수요자란 이름으로 가하고 있으니, 칸트가 보면 경을 칠 노릇이 아닐까?
이제 본론이다. 그런데 서론에서 이미
개요를 다 이야기 했기 때문에 정작 본론에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는다. 칸트는 나름 교육의 각 단계, 즉 양육, 훈육, 지식교수, 도덕교육에
해당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좀 시대에 맞지 않고,
때로는 이 책의 품위(?)와도 맞지 않는다. 특히 양육에 관한 부분이 그렇다.
그러나 그렇게 구체적인
부분들(이를테면 아기에게 무엇을 먹이고, 옷은 어떻게 입히고 등등)까지
세심하게 연구하고, 그 바탕 위에 교육학을 세우려 한 칸트의 자세를
배우자면
배워야 할 것이다.
본론에서 칸트는 교육과 교육이론이 자연적일수도 있고, 실천적일수도
있다고 한다. 여기서 자연적인 교육은
인간이 동물과 공유한 것과 관계하고, 실천적인
부분이 바로 인간이 인격적 존재가 될수 있는 교육이다.
칸트는
지난 발제에도
나왔듯이 이 실천적 교육을 다시 세 단계로 나눈다.
1) 문화화 하는 교육(지식교육): 시민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또 여기에
영향력을
끼치고 이용할 수 있는 여러가지 능력을 계발하고, 여기에 숙달, 숙련되게 함.
다소 기계적인 방식으로 수행되며 주요 무대는 학교. 실제
우리나라 학교에서 행해지는
대부분의 교육과정은 아직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2) 문명화
하는 교육(사회교육): 사회생활에
필요한 여러가지 실용적인 능력, 분별력, 예절 등을 익혀서
자신을 공동체에 적응시킬수 있는 능력을 키움. 이것은 일종의 사교와 관련된, 그리고
각종 의례 등과 관련된 교육으로 시민사회가 주된 교육의 장소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종류의 교육은 어디에서도 하고 있지 않다. 칸트는 지식과
도덕의 중간단계로
이 문명화 교육을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3)도덕교육: 학생들의 도덕성, 품성과
성격을 함양하여 인류공동체 속에서
제자리를 찾게 하는 교육이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자유로이 행위하는 존재가 된다.
그런데 칸트는 이런 실천적 교육이 어린이의
발달단계에 맞도록 순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훈육이 이루어져야 할 시기에 숙련이나
실용적 분별이 먼저 깨친 어린이는 교활한 아이가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자연적교육으로서 양육과 훈육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는데, 이는 건너 뛰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나서 실천적 교육의 구체적인 사례와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 중 첫단계가 여러 능력들을 기르고 키우는 교육인데,
그 중에서 특히
마음의 능력들, 정신의 능력들을 키우는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어떤 체계적인
학습이론을 기대하기는 어려운데, 이는 그의
제자인 헤르바르트에 가서야 완성되는 부분이다. 다만
몇 가지 경구적인 충고들은 귀담아 들을만하다.
70절, 인간에게 가장 좋은
휴식은 일을 한 뒤 향유할 수 있는 휴식이다. 따라서 아이들을 일하는
것에 습관적으로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아동교육은 일정한 규제와 강제,
즉 외부로부터의
의무를 함축하고 있는 방법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지만, 비열한 노예근성이 나오게 해서는
안된다.
71절, 아동의
마음의 능력은 마음의 높은 능력들을 주로 고려하여
키워야 한다. 즉 기지와 재기는 지성의 능력을 고려하여 길러야 한다. 어떤
한 능력만 따로
길러서는 안되며, 다른 마음 능력들과 관계지워서 키워야 한다.
칸트는 저차 능력으로 기억력, 기지, 재치, 상상력 등을 들고
있으며,
고차능력으로 지성(일반적 원리 인식하는 능력), 판단력(이를 개별 사례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 이성(여러 일반적 원리들의 연결을
통찰하는 능력)을 들고 있다. 따라서 단순한
기억, 단지 상상은 의미가 없다.
결국 칸트가 제안하는 교수방법은 지성을
중심으로
다양한 영역의 능력들이 유기적으로 발휘되는 통합적인 교수다. 물론 이는 기계적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학생들이 지성의 규칙을 사용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속에
이루어져야 한다. 즉 지성의 규칙은 그 사용과 그 습득이 같은 과정이라야
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칸트는
교육의 목적에 대한 체계적 개념화
뿐 아니라(이는 주로 서론에서 완결됨), 그 목적을 성취하는 방법에 대한 체계적
개념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본론이 이것을 다루고는 있으나 미진함).
우선 지식(마음의
능력 기르는 교육)교육에 대한 방법론은 통합교수로 귀결되었고,
칸트는 다음으로 도뎍교육의 방법론으로
이행한다. 여기서 그는 습관이 아니라 자기의 행위규칙에서 말미암아 선핸행위를 수행해야 한다는
그의 대표작인
"윤리형이상학의 정초"의 근본 원리를 재확인한다. 즉, 자기가 해야 할
행위의 정당한 이류를 알고, 이를 도덕적 의무 개념에서 추론, 정당화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과 악의 행위 규칙에
따라 추론하여 행위할수 있을때 훈육과 구별되는 도덕교육이 성립되며, 이는
그의 앞서
도식에 따라 교육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이다.
따라서 그는 상벌에 의존하는
교육을 도덕교육을 훈육 수준으로
격하시킨다고 보아 거부한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어 버릇을 망쳐서도, 혹은 의도적으로 거절하여 노예근성을 배게 해서도 안된다. 그
바탕에서는 항상 일관된 원칙이 있어야 하며, 정당한 행위규칙의 정당성을 아동이 통찰할수
있도록 해야한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부모와
교사가 가장 조심해야 할 원칙이
도출되는데 그것은 바로 보편성이다. 부모와 교사는 자신의 경향성,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항상 보편적 원리 아래
스스로를 정당화하면서 아동들을 대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칸트는 하나의 난제를 남겨 두는데, 이러한 도덕교육이 어릴때부터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훈육이 완료된 다음에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어릴때도 처벌,
상이 아니라 원리를 깨닫고 받아들이면서 운운하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아동의 복종은 청소년의 복종과 다른데, 청소년은 의무에서 비롯된 복종을
한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이는 루소의 잔영으로 보인다. 그래서 훈육기 아동의
처벌을 인위적인 강제, 무력으로 보지는 않는다.
자연적인 결과가 가장 훌륭한 처벌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도덕적인 경멸과 수치감이 발전된 처벌이 되며, 마지막으로 의무가
등장한다.
그 외에도 잡다할 정도로 많은 제안들이 있지만, 일일히
고려할만하지는 않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정서적 건강이 매우 불안하고 예민한 균형상태에서 유지되고 있음에 동의하고 있다. 특히 자아의 존재론적 안전감은 그것을 지켜주는 든든한 배경이 무너질 경우 정처없이 흔들리게 된다. 이렇게 존재론적 안전감이 위태로워질때 자아는 본능적으로 만사를 자아의 안전을 위해 재배치한다. 즉, 정신적 정당방위를 시도하는데, 그 과정에서 타인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존재론적 안전감의 배경에는, 공유되는 신념, 반복되어 온 관행, 자연, 전통, 가족과 같이 비교적 영속적인 친밀한 관계 등이 있다. 즉 아무리 풍파가 닥쳐와도 큰 변화 없이 의존할 수 있는 그런 문화적, 사회적, 심리적 대상들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안전하지 않다. 최근의 요동치는 금융 위기는 안전하지 않은 현대의 상징이다. 어떤 변화에도 불변이었던 재산의 상징이었던 "금"과 같은 상품은 존재하지 않고, 브레턴우즈 체제 붕괴 이후 "달러"도 한낱 유동성이 되었다. 그 어느 가치도, 제도도, 관행도, 가족관계도 안전하지 않다.
학교는 그 동안 비교적 안전한 공간이었다. 입시교육이라는, 그리고 관료주의라는, 권위주의라는 불변의 관행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위협받거나 해체되고 있다. 해체되는 관료주의 하에 교사들은 스스로 생각할 필요 없이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되었던 각종 관행들이 무너지는 것을 체감한다. 이제 교사들은 권위와 관행이라는 버팀목이 사라진 상황에 스스로 적응해야 한다. 학생들에 대한 권위는 스스로 만들어야 하며, 학생들과의 친밀감도 저절로 생기지 않아, 늘 협상하고 타협하고 감정노동을 해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상처도 받아야 한다.
특히 여기에서 몸부림을 치게 되는 존재들은 교감, 교장들이다. 이들은 과거처럼 단지 교장, 교감이라는 이유만으로 내리게 된 네크로필리아적 명령들이 번번히 반발과 항의에 부딪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결국 명령이 관철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교사들이 인간적인 감정이 더 악화되는것이 싫어서 마지못해 하는 것이지, 과거와 같은 복종이 아니다. 교장, 교감들 역시 그것을 잘 안다.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예"하는 교사들이 아니라 앙앙불락한 얼굴로 마지못해 하는 교사들과 계속 같은 공간에서 얼굴보며 생활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이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교직원들이 심리적 안전감을 주는 공동체가 되려면 교장, 교감의 권력이 무너져야 한다. 그 권력을 지키려면 자신을 적대시하고 백안시하는 수십명의 교사들 가운데 섬처럼 존재해야 한다.
이런 상황은 교장, 교감들을 자기도취적 장애 상태로 이끈다. 그리하여 이들은 난초, 바둑 같은 개인적인 취미에 탐닉하거나, 아니면 교사들을 괴롭히는 가학성 변태행위에서 쾌감을 추구하거나, 아니면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더욱 더 자신의 아집에 집착한다. 이로써 이들은 완전히 자아를 상실하고, 정서적으로 망가진다. 이런 정서적 망가짐은 수시로 솟구치는 분노의 형태로 내장되며, 이는 많은 교장, 교감들을 시한폭탄 같은 존재로 만든다. 문제는 교사들 역시 학생들을 상대로 이런 상태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의 교무실이란 시한폭탄들로 득실대는 무시무시한 장소다. 여기서는 멀쩡한 사람도 상처받기 십상이다.
어쩌면 이것이 공교육보다 사교육을 신뢰하는 이유중 하나인 것 같다. 직접 누가 해 본적은 없지만, 아마도 학원 강사들이 학교 교사들보다 정서적으로 더 건강할 가능성이 크며, 이는 경력이 길어질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