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맥켄지(Scott McKenzie)의 아름다운 노래 [San Francisco].

팝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이 노래만큼은 잘 알 것이다. 예전에 TV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애인]이라는 연속극에 삽입되어 뒤늦게 국내 음반계에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왔던 음악이기 때문이다. 아마 [애인]은 이른바 불륜을 소재로 한 최초의 연속으로서 당시 안방극장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극중에서 두 주인공(황신혜, 유동근 분)이 만나는 장면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 노래가 그렇고 그런 사랑타령을 주제로 한 팝음악인 줄로 알지만 노랫말이나 이 노래가 생겨난 배경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노래의 원제목은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Some Flowers]인데, 샌프란시스코에 갈 때면, 왜 꽃을 머리에 달라는 지가 궁금해진다. 사실, 이 꽃 이야기는 팝 음악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위의 노래가 발표된 시기는 1960년대 말이었다. 이 시기는 마르틴 루터 킹이나 말콤 X를 필두로 한 흑인 민권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으며, 미국이 명분 없이 개입한 베트남전쟁 때문에 젊은이들 사이에서 기성세대에 대한 강한 불신과 반항심이 고조되고 있던 때였다. 청년들의 이유 있는 반항은 학생운동과 히피즘으로 표출되는데, 학생운동의 진원지라고 수 있는 곳이 바로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위치한 버클리대학이다.1)

그리고 통기타, 청바지, 장발 그리고 오토바이 질주로 대변되는 히피즘(hippism)도 샌프란시스코의 헤이트 애쉬베리(Haight-Ashbury)에서 생겨났다. 애쉬베리는 일종의 슬럼지구로서, 당시 젊은이들이 그들의 고뇌를 예술로 표현하기 위해 창작활동에 몰두하던 곳을 말한다. 올리버 스톤의 영화 [도어즈]에서 짐 모리슨(발 킬머 분)이 여자 친구(멕 라이언 분)를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장소가 바로 헤이트 애쉬베리이다.

히피(hippie)하면 보통 광란의 오토바이 폭주족(Easy Rider2))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들은 퇴색된 의미에서의 사이비 히피들일 뿐, 진정한 히피들은 나름대로 고상한 신념체계를 지니고 있었다.

 


1967년 1월, 샌프란시스코의 골든게이트공원에서 “사랑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이 모여 일종의 궐기대회를 열었는데 순진무구한 청년들이 다름 아닌 히피들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여의도광장에 모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던 것처럼 이들은 [San Francisco]를 불렀다. 즉 이 글에서 소개하는 노래는 히피들의 집회에서 로고송이었던 것이다. 가사 내용이 전체적으로 그러하다. 당대의 '샌프란시스코'라는 지역은 히피즘의 메카이자 히피들의 꼬뮨이었는데, 이 노래의 내용은 천편일률적인 사랑타령과 전혀 거리가 먼 것으로서, 너도 나도 꽃을 머리에 달고서 "함께 연대해서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자"는 호소문인 것이다.


히피들은 현대인들이 중요시 여기는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성공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 대신, 사랑과 화평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합치를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한다. 이들 신념의 밑바탕에는 동양의 선(禪)사상, 특히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1970년 비틀즈가 발표한 [Let It Be]의 가사내용에서도 엿볼 수 있는 바, 히피즘이 당대 청년문화에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3).

꽃은 히피들의 해맑은 신념을 상징한다. 히피들의 집회인 러브인(love-in)에 참가하는 모든 이들은 반드시 머리에 꽃을 달고(some flowers in your hair) 와야만 했다. 심지어 집회를 감시하는 경찰들도 그 분위기에 압도당하여 헬멧에 꽃을 달았을 정도라고 하니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히피즘이 기성 문화에 대한 반문화(counter-culture)의 형태로 생겨났음을 생각할 때, 꽃은 총에 대한 대립물로서 일종의 ‘무언의 저항’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히피즘은 피부색을 초월한 인간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간의 주류 문화들이 한결같이 서구중심적(이른바, 문명)이었음에 비해 히피즘은 아프리카의 부두교(이른바, 야만)와도 손을 잡는다. 히피들이 베트남전을 반대했던 것도 이러한 코스모폴리터니즘과 상관있을 것이다. 총을 버리고 꽃을 머리에 꽂아 반전과 평화를 부르짖은 히피들의 의거를 세인들은 '플라워 무브먼트(flower movement)’라 일컬었으며, ‘꽃의 아이들(flower children)’은 히피들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풍문과는 달리 히피들이 매우 건강한 청년들이었다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플라워 무브먼트는 록음악과 결합하여 찬란한 꽃의 문화를 양산하였는데, 그 중 일부는 지금도 팝 역사에 전설로 남아 있다. 1967년, 몬트레이(Montrey)에서 시작된 팝 페스티벌은 우드스탁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세간엔 ‘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festival)’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이 행사가 벌어진 장소는 우드스탁으로부터 약 50마일이 떨어진 한 낙농업자 소유의 개인 농장이었다. 당국으로부터 장소 사용 허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한 장면 :

등을 보이고 있는 왼손잡이 기타리스트는 지미 헨드릭스이다

1969년 8월 15일, 50만 명의 젊은이들은 사흘간의 밤낮을 비탈진 언덕에서 보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공연기간 내내 비가 내려 청중들이 앉아서 먹고 자는 땅바닥은 온통 수렁으로 변했다. 뿐만 아니라, 페스티벌 참가자들이 타고 온 차량행렬이 수십 마일의 도로를 점거한 탓에 외부에서의 식료품 공급이 불가능했으며, 턱없이 부족하고 불편한 위생시설 등은 극도의 무질서와 혼란을 야기하기에 충분했다. 시간당 수십 건의 살인과 강간이 자행되는 나라에서 50만의 젊은이들이 인간으로선 견디기 힘든 악조건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사운드와 마리화나에 취해 거침없는 표현과 과감한 노출을 일삼는 이 위험천만한 젊은이들이 모인 목장이 곧 아수라장으로 변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그러한 우려와는 달리, 젊음의 발산은 80년대 록그룹의 이름처럼 ‘평온한 폭동(Quiet Riot)’으로 결말을 맺었다. 사랑의 힘을 믿는 온화한 기질의 소유자들(gentle people, 이 노랫말의 주요 키워드 중의 하나)은 그들 머리에 단 꽃의 영예를 욕되게 하는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았다. 히피들은 헤이트-애쉬베리란 ‘꼬뮨’에서 단련한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불편함을 서로 나눌 줄 알았던 것이다. ‘우드스탁’은 신화로 남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으며, 또 이것은 청년 문화의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리하면,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의 시대상황은 젊은이들에게 허무 그 자체였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반항이 허무와 광기로 그치고 만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대중음악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 형태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그 꽃밭은 다름 아닌 샌프란시스코였던 것이다. 이젠 왜 꽃을 머리에 달고 샌프란시스코에 가야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렸을 것이다.



한편, 샌프란시스코에서 개화한 '꽃의 문화'는 태평양을 건너 동토의 한반도에도 싹을 틔웠다. 당시 한국은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가 '유신'이란 가당찮은 논리로 종신집권을 획책할 때였다. 이 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탁월한 매판적 역량을 인정받아 만주에서 독립군 토벌대(관동군: 일제의 정예부대)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기도 하다.4)

구린 과거를 지녔기에 이 자는 모든 국민들에게 입을 다물게 했다. 말 많은 사람은 빨갱이로 몰아, 어떤 이(장준하: 자신의 과거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는 산에서 실족케 하였고, 또 어떤 이는 바다에 빠뜨리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란 이상한 이름의 파쇼적 억압은 정치면에서 그치지 않고 문화의 꽃밭에도 강력한 제초제를 치기 시작했다. '한국적 문화대혁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당시 가장 바빴던 사람은 경찰들이었다. 그 시대의 경찰은 도둑놈 잡으랴, 데모 진압하랴, 그리고 30센티미터 자를 들고 다니며, 거리에 머리카락이 길거나 치마가 짧은 성인남녀를 찾으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시의 한국은 문화인류학자들이 연구대상으로 삼을 만한 신비의 나라였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문화는 항상 기성세대의 권위에 대한 반항을 통해 다져지고 발전하는 법이다.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그리고 한국대중음악의 대부인 신중현, 이들은 한국형 '꽃의 아이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암울한 시대에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대중음악의 꽃을 피웠다.


"청년이 침묵하는 곳에, 사회의 진보는 없다"

마르쿠제의 영향을 받아, 노동계급이 아닌 청년학도들이 질풍노도처럼 사회의 진보를 이끌었던 그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혹자들은 묻는다.

Where Have All the Flower Children Gone?

'꽃의 아이들'은 죄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70년대초를 기점으로 미국사회에서 히피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닉슨 정부를 굴복시켜 베트남전을 종전케 한 미국 청년들의 위대한 몸부림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었는가? 이러한 사정은 한국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6.3에서 시작하여 5.18과 6월 항쟁을 이끈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한국의 학생운동이건만, 요즘은 대학가에서 데모하는 대학생을 찾아보기 힘들다.


청년이 침묵하는 곳에 사회의 진보는 요원하련만...


1)60년대말 학생운동은 유럽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가 대표적인데, 이들은 사상적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 특히 마르쿠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네오맑시스트인 마르쿠제는 노동계급이 아닌 인텔리겐차(대학생)과 룸펜프롤레타리아트들이 사회변혁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류역사에서 진보의 굵직한 획을 그은 특별한 해가 있는데 1789나 1917 못지않게 1968이란 숫자가 그러하다. 맑시스트 학자 크리스 하먼이 지은 [세계를 뒤흔든 1986, 책갈피, 2004]은 1960년대말 유럽 청년의 저항사를 잘 서술한 책인데, 저자는 책 머리말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때때로 한 세대 전체를 마법에 빠뜨리는 특별한 해가 있다. 이런 시기는 나중에 그 해를 단순히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의 마음 속에 수많은 상념이 떠오르게 한다. 1968년이 바로 그런 해였다.”

 


 

2)데니스 호퍼(Dennis Hopper)가 감독 및 주연을 맡은 훌륭한 영화 [이지 라이더] 또한 히피 시대 청년들의 초상을 관람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영화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3) 레넌이 시(가사)를 쓰고 메카트니가 선율을 매긴 것에 필 스펙터(Phil Spector)라는 명 프로듀서가 손질을 하여 완성된 이 아름다운 곡은 제목부터 ‘無爲’란 한자어를 그대로 영어로(Let It Be) 옮기려 애쓴 듯하다. 전체 가사 내용 또한 영국인 고유의 카톨릭 신앙에 노자를 접목시켜 시종 막연한 낙천주의를 설파하고 있다.


 

4) 그렇다고 이 자의 두뇌가 명석했다고 생각하지는 말라. 대구사범학교 시절 이 자의 반 성적을 보면 45명 가운데 줄곧 꼴찌에서 1-2등을 맴돌았다. '사람 죽이기' 공부에는 우등생이었고, '사람 살리기(敎育)' 공부에는 도무지 취미와 적성이 맞지 않는 부적응아였던 모양이다.



 

  □ 들어가기 앞서 : 한국사회의 교육 자화상


<에피소드 -1>

“놀이터여, 안녕 Farewell to My Playground!"


헤밍웨이 원작의 영화제목 “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를 연상케 하는 이 화두는 영화가 아닌 TV 광고 제목이다.

새 학년도가 시작되는 3월을 맞아 어린 아이는 놀이터를 향해 “잘 있거라, 나의 친구 놀이터야” 하며 담담한 표정으로 손을 흔드는데, 그 장면의 배경음악으로는 가수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가 흘러나온다. 스무 살 청년이 군인 갈 때처럼, 미래에 닥쳐올 난관을 이겨내기 위해 자기 생애의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한 준비자세가, 다름 아닌 코흘리개 초등 1학년생에게 요구 된다”는 것이 이 광고가 던지는 메시지인 것이다.

옛 성현께서는 "배우고 익히면 때론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하셨는데, 어떻게 이 사회에서는 '배움의 여정'이 무거운 짐을 지고서 멀고도 험한 길을 가는 고역으로 각인되어 있는가? 그 광고는 조금도 과장이 아니어서 실제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아이도 아이의 엄마도 비상체제에 돌입하는 것이 우리네 현실임에 틀림없다.


<에피소드 -2>

몇 해 전, 필자가 초등학교2학년 담임할 때, 착실한데도 숙제를 잘 해오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 왜 그런가 알아보니, 학원에서 숙제를 너무 많이 내주는 것이었다. 어떤 숙제인가 하면, 학원에서 사용하는 문제집이 있는데 그 문제를 하루에 50문제 정도씩 풀어가야 한다고 한다. 세상에... 초등2학년 [슬기로운생활] 한 과목에 200문제씩 담겨져 있다. 대부분 아래와 같은 문항들이다.


문제) 다음 중 우리가 옷을 입는 이유로 잘못된 것은?

1)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2) 땀을 흡수하기 위해

3) 추위를 막기 위해 4) 남에게 보이기 위해


정답은 4번이란다.

도대체 말이 되는가? 고객의 입장에서 옷 고를 때 고민하는 주된 이유가 뭔가? 패션 디자이너가 4)번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옷을 만든다면 그 옷이 팔리겠는가? 이른바 명품의 그 무엇에 대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현실이 이러함에도 그 시험지는 학생들에게 4번을 정답으로 “강요”하고 있다. 상식적으로는 4번이 전혀 답이 될 수 없음에도 출제자가 요구하는 정답 4번을 정확히 골라내는 아이는 모의시험 - 즉, 문제집 풀이 -이나 실제 시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점을 "잠재적으로" 그리고 "강력히" 학습할 것이다.

"삶 따로 공부 따로...... 현실 속의 진리와 공부에서의 진리는 별개의 것이다!"


<에피소드 -3>

중학교 [사회] 수업시간이다.

교사는 프랑스대혁명에 관해 수업하다가 그 연장선상의 심화내용으로 한국의 6월항쟁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교사는 자신의 젊은 시절 추억의 세계로 돌아가 약간은 격앙된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과거 이 땅의 독재정권 시절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 암울한 반동의 세월을 우리 민중들이 어떻게 이겨냈는지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이런 강의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청중(즉, 학생)의 참여가 사뭇 적극적이고 진지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뒤편에 앉은 한 녀석이 적막을 깨고 (이른바 교육수요자의 입장에서) 교사에게 민원(?)을 제기한다.

“진도 나갑시다!”

단원의 학습주제에 충실하여 열심히 잘 나가고 있는 진도를 저지하는 이 당돌한 학생은 [사회] 시험을 만점 받는 이른바 ‘공부 잘 하는’ 아이이다. 이 사회에서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 평가의 교육적 의의


이 글에서 필자는 ‘시험(test)’과 ‘평가(evaluation)’를 구별해서 쓰고자 한다. 평가는 교육실천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서 성공적인 교육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교육 실천의 한 프로세스이다. 진단평가, 형성평가, 총괄평가가 그러한 예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들이 ‘시험’의 형식을 취할 때 여러 가지 반교육적 폐단을 파생시킨다. 내가 말하는 ‘시험’이란 “서열을 가리기 위한 평가”를 말한다. 이 글에서 ‘평가’라 할 때는 긍정적인 의미, ‘시험’은 부정적 맥락에서 사용할 것임을 미리 일러둔다.

교육철학자 듀이는 “교육은 성장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모든 성장은 변증법의 원리에 따른다는 점에서 평가의 교육적 의의가 있다. 여기서 ‘평가’는 반드시 지필고사나 수행평가의 형식을 취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수업 시간 내에 교사가 질문하고 학생이 응답하는 것도 하나의 평가일 수 있다(형성평가). 그러면, 성장과 평가, 변증법적 원리와 평가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성장의 변증법적 원리라는 것은 사물이 ‘부정의 부정’의 과정을 통해 발전해가는 이치를 뜻한다. 오류 없이 성장하는 유기체는 없다. 쏜다이크(Thorndike)의 ‘시행착오설’이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듯이, 유기체가 발전하는 원리는 숱한 오류에 이은 반성의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환언하면, 시행착오 없이 의미있는 배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 것이다. 그런데, 교육의 장에서 학습자는 ‘평가’라는 계기를 통해서 자신의 오류를 가장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깨우치며 자신의 행동을 수정해갈 수 있다. 평가는 행동의 수정을 위한 강력한 피드백의 효과를 제공하는 것이다.

모든 교육은 교수와 학습이라는 두 계기(moment)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기에, 평가를 통한 오류 수정의 효과는 학생 외에 교사에게도 더 나은 가르침을 위한 중요한 기능을 한다. 즉, 교사들은 자신의 교수법이나 수업실천이 얼마나 적절한가의 여부에 대해 오직 학생의 반응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니터링은 수업시간에도 이루어지지만 보다 강력한 피드백은 ‘평가’에서 이루어진다. 교사는 특정 문항에 대한 학생들의 오답을 접하면서, 처음 한 두 학생의 오류를 대할 때는 학생을 탓하지만, 동일한 오류가 계속 되풀이 되어 자기 눈에 들어올 때는 정작 문제가 있는 쪽은 학생들이 아니라 그 내용을 가르친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게 되는 것이다.

교육이 학생과 교사 간의 양방향 소통으로 이루어지듯이, 평가 또한 결코 일방적인 교육실천이 아니다. 우리가 가르친 학생을 평가하는 것은 곧 나 자신에 대한 평가가 수 있으며, 교사와 학생 공히 평가라는 계기를 통해 숱한 시행착오 속에서 더 나은 학생, 더 나은 교사로 성장해가는 것이다. 요컨대, 교사에게 평가는 더 나은 수업을 위한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모니터’로 기능하는 교육실천인 것이다.

지금까지, 평가가 교육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근거에 대해, “교육의 본질은 성장인데, 모든 성장은 변증법적으로 이루어진다. ‘평가’는 이 변증법적 발전(부정의 부정, 시행착오)을 촉진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는 것을 논하였다. 이어지는 평가의 반교육적 폐단 또한 같은 원근법에 터하여 논리를 전개하고자 한다. 나는, 일제고사의 해악성이 그 무엇보다 그것이 학생의 자발적인 성장을 저지하는 반(反)변증법적 속성을 본질로 하는 것과 관계있다고 본다.



□ 일제고사의 반교육적 폐단


다시, “교육은 성장”이다.

죤 듀이의 이 명제가 의미하는 바는, 모든 인간은 본연에 내재된 자발적 성장 능력이 있기에, 어린 학생들은 있는 그대로 던져 놓으면 자기 나름의 숱한 시행착오를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성장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학교 교육의 역할은 학생의 자발적 성장을 방해하지 않고 그 자발적 성장을 돕기 위한 최적의 인적․물적 환경을 제공함에 있다. 그러나, 일제고사는 학습자의 그러한 자발적 성장에 방해가 되는 최대의 걸림돌이다. 그것은 일제고사가 “성장의 변증법적 원리”를 크게 거스르기 때문이다.


1) 일제고사는 줄세우기를 목적으로 삼는 그 자체로 반교육적이다.

계량화, 즉 점수로 환산되는 모든 시험은 줄세우기를 근간으로 하기 마련이다. 이 제로섬게임에서 숨 가쁘게 펼쳐지는 경쟁은 끝이 없어서, 이를테면 모두가 밤샘 공부를 해도 일등과 꼴찌가 생겨난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앞서기 위해 모두가 바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놀이터에 이별을 고하고 모두들 학원으로 향한다. 놀이터에 친구가 없으니 친구 사귀기 위해서라도 아이를 학원으로 보내야 한다. 1)

초등학교에 입학한 코흘리개와 그 부모들을 겨냥해서 “놀이터여, 안녕”이란 비장한(?) 제목의 광고가 TV를 통해 유포되는 이 사회는 상식적으로나 교육학적으로도 그저 ‘미친 사회’일 뿐이다. ‘무한경쟁’이니, ‘명품교육’이니 하는 얄궂은 구호가 같은 야만성을 정당화 하고 있지만, 이 미친 짓거리들은 “교육학적으로” 명품이 아닌 ‘천박’ 그 자체이며, 국가경쟁력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생각해보라. 초등 1학년짜리에게 ‘놀이터’는 절대적으로 소중한 교육의 장이다. 이 소중한 체험학습 마당에서, 우리 사회 미래의 주인공들은 또래끼리 부딪으며 양보심과 협동심, 그리고 점차 메말라 가는 이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공동체 의식을 학습해 가는 것이다. 흙을 만지며 꽃내음을 맡으며 자연의 신비를 깨달아 갈 것이며, 다양한 노작 활동을 통해 페스탈로치가 말하는 3H 즉, 손재주와 영민한 머리 그리고 따뜻한 가슴을 키워 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설학원 수업이나 문제집 풀이 따위를 통해 드릴로 일관하는 그런 교육을 받으며 자란 아이 가운데 아인슈타인이나 베토벤이 나올까?

치열한 경쟁의 교육시스템에서는 배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남보다 더 나은 점수를 받는 것이 목적이 된다. 내가 내신성적 1등급을 받기 위해 나와 비슷한 레벨의 친구가 “노트 필기한 것을 빌려 달라”고 해도 그 부탁을 거절해야만 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우정이나 공동체의식에 터한 따뜻한 영혼이 길러질 리가 없고, 학생들은 오직 점수의 화신이 되어 질투심이나 악의적인 경쟁심만을 키워간다. 이른바 “공부 하는” 아이들에게서 이런 경향성이 농후한데, 장차 이들은 이 사회의 엘리트가 되어 힘없는 선량한 대중들 위에 군림하며, 이 비인간적인 메카니즘을 재생산하는데 이바지 것이다.

“경쟁력 있는 교육”을 강조하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이러한 서열화는 학생 개인간의 경쟁에서 학교간의 경쟁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점수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주변 학교와의 비교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온갖 발버둥을 칠 것이며, 학교의 등수가 재정의 차등 지원으로까지 이어지면 각종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학생들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다. 이 미친 정책이 계획대로 추진된다면, 앞으로 이 사회에서 “희망의 교육공동체”로서의 학교의 기능은 깡그리 말살될 것이며, 그 자리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소(所)”만 남을 것이다.



2) 실패가 미덕이 아닌 무능의 낙인이 되는 일제고사

앞서 살펴봤듯이, 평가가 학생의 성장을 촉진하는 중요한 매개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주로 정답보다는 오답에서, 성공보다는 실패를 통해서였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민중의 언어가 시사하듯, 최종적인 성공의 열매는 숱한 실패를 자양분 삼아 맺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배움의 장에서 학생들은 어떤 목표에 대하여 과감하게 도전하고 또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도록, 말하자면 어떠한 실패에 대해서도 허용적인 분위기를 조성해줘야 하는 것이다.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이련만, 시험 위주의 우리 교육현실에서 한 번의 실패는 영원한 실패, 한 번 낙오자는 영원한 낙오자가 된다.

성장이 이루어지는 지점은 결과보다는 과정에 있음에도, 시험 위주의 교육 시스템 속에서는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간다. 즉, 시험이라는 것이 교육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교육이 시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변증법적 원리에 충실한 참된 성장이 이루어질 수 없다. 결과가 나쁘면 과정은 깡그리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3) 일제고사는 가르친 이가 평가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교육의 중요한 원리에 위배된다.

교육원리상, 평가는 교수행위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마땅히 가르치는 이의 몫이어야 한다. 교육이 교육으로 성립하기 위하여 이 원칙은 거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이다. 이 원리는 무엇보다 교육이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사실에서 말미암는다. 다시 말해 인간대 인간으로서 교사-학생의 만남이 없으면 교육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남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교실의 전형을 우리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속의 키튼 선생의 수업에서 보았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도 ‘키튼 교사’는 얼마든지 수 있는데, <에피소드 -3>이 그 좋은 예이다. ‘프랑스대혁명’이나 ‘한국의 6월 항쟁’을 소재로 한 수업의 장면에서 학생들은 한국형 키튼 교사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는 역사적 순간들을 추체험하며 때로는 분노를 때로는 환희와 함께 생생한 배움을 익혀갈 것이다. 교수활동과 학습활동은 항상 변증법적인 관계에 있기에, 교사의 신명나는 가르침에 아이들도 배움의 희열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수업 분위기를 깨뜨리며 “진도 나갑시다”라는 하극상(?)의 발언이 공부 잘 하는 학생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이유는 뭘까? 교사나 대부분의 학생들이 진지하게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진도를 나가야 충실한 공부가 된다는 말인가? ‘공부’란 대관절 뭘 뜻하는가?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도대체 뭘 의미하는가?

“진도 나갑시다”라는 학생의 말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그런 수업은 흥미는 있지만 시험에는 출제되지 않는다”는 지극히 영악한 계산법이다. 이명박이 말하는 ‘실용주의’가 이를 뜻하는지도 모른다. 이는 가르치는 이와 평가하는 이가 각각 따로 존재하는 일제고사 시스템이 파생시킨 “우리 시대 교육의 비극”이리라. 가르치는 이에게 평가권이 주어진다면, 그리고 교사의 권한을 떠난 어떠한 일제식 국가고사(수능 따위)도 치러지지 않는다면, “진도 나갑시다”란 따위의 헛소리가 사라질 것이다. 곧은 신념으로 교단에 서는 스승이 그 존귀한 권위를 회복 받을 것이다.

덧붙여,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란 측면에서도 “가르치는 이가 평가해야 하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주입식 교육이 판을 친다. 우리 교육 현실에서는 ‘교과서’가 곧 ‘교육과정’을 의미한다. 방대한 양의 독서보다는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 문제집을 부지런히 푸는 학습 방법이 높은 점수를 보증한다. 요컨대, 드릴이 최고의 교수-학습법이며 총정리문제집이 가장 위력적인 학습 무기이다. 학부모들이 학교교육보다 학원교육을 더 선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청 차원에서 떠들어대는 ‘자기주도적 학습’이니 ‘창의적 교수법’이니 하는 구호들은 현실적으로 전혀 실효성이 없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으론 “창의성 교육에 힘쓰라”고 떠들면서, 다른 한편으론 “시험 점수로 학교간 순위를 매기고 또 그 순위에 의거하여 교육재정을 차등적으로 지급한다”는 작태야 말로 이 땅의 교사와 학생들을 분열적으로 몰아가는 “정신분열 교육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4) 전혀 객관적이지 못한 객관식 일색의 일제고사는 학습자의 비판력과 창의력을 말살시키는 “지적 자살행위”이다.

일제고사는 객관식 시험 형태로 이루어진다. 또한 일제고사가 줄세우기를 근간으로 하는 것과 그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현재 한국의 중등학교에서 치러지는 대부분의 학력고사가 그러하며, 국가차원에서 실시하는 모든 표준화시험이 객관식으로 치러진다. 평균 점수 0.1 사이에 내신등급이 왔다갔다하는 체제 하에서 객관식 시험이 아니라면 채점결과에 대한 학부모의 민원으로 학교가 몸살을 앓을 것이 뻔하며, 국가의 입장에서 전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석차를 내려면 객관식 시험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피소드-2>에서 보듯이 특히 교내 학력고사의 객관식 시험은 그 내용상 전혀 객관적이지 못하다. 상식적으로는 전혀 타당성이 없는 것이 정답으로 통하는 그 시험이 어떻게 객관적이란 말인가? 또한, 아무리 엄선된 내용의 표준화시험이라 하더라도 모든 객관식 시험은 변증법적 원리에 전면적으로 위배된다. 그것은 학생들에게 맹목적으로 정답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 구조적 성격상, “보기 가운데 무조건 답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치러지는 객관식 시험은 학습자의 비판력과 창의력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나는, 객관식 시험이야말로 변증법적 성장에 장애가 되는 최악의 폐단이라고 생각한다.

루시앙 골드만(Goldman, L.)의 다음과 같은 말은, 사회의 진보와 관련하여 객관식 시험이 얼마나 해악한가를 논증하는데 뜻 깊은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사회과학이 변증법적이어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 물음은, 사회과학이 현실세계를 바로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왜곡시키고 은폐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과도 같다.2)


변증법적으로 사고함은 무엇보다 현실 사회의 모순에 대한 탐색을 내포한다. 참된 지적 성장을 위해 이 같은 변증법적 사고가 필요한 것은 사물의 현상과 본질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3) 마르크스의 말대로, “사물들의 현상형태와 본질이 일치한다면 어떠한 과학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즉, 인간 지성의 발전은 본질과 현상 사이의 간극(또는 모순)을 부단히 좁혀가는 과정일진대, 이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아니하여 변증법이란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변증법은 모순된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으로 나아가는 가장 유력한 방법론인 것이다.

변증법적 관점이란 현상의 이면에 감춰진 내부에 대해 꿰뚫어 보는 것을 의미한다. 변증법이 ‘혁명의 대수학’이라 일컬어지는 까닭은 그것이 비판적 관점과 창의성을 촉진하는 사고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르치지도 않은 제 3자 - 나와 세계관이 다른 교사나 장학사 그리고 국가에서 위촉한 교육엘리트 - 가 그의 의도에 따라 만든 획일적 정답을 요구하는 객관식 시험을 통해서는 제도권 질서에 순응하는 노예가 길러질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변증법적 사고는 현재의 가정이 수정되고 반박되고 전도될 가능성에 대해 항상 열려 있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것은 사물의 속성이 ‘운동성’과 ‘변화’를 본질로 하는 이치와 관계있으니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다. 오늘의 진리가 내일도 진리로 남으리라는 보증이 없는 것이 지식의 본질(=지식의 상대성)인데, "이거냐 저거냐 식의 양자택일4)"을 강요하는 객관식 시험은 학습자의 지적 성장에 큰 걸림돌로 기능한다. 이런 시험을 많이 칠수록 학생들은 점점 반변증법 사고에 익숙해질 것이기에, 이 사회의 학습자들은 말하자면,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바보가 되어간다”



5) 똑똑한 아이들을 잔머리 작동기계로 만들어가는 일제고사

객관식 시험은 일단 논술평가보다 시험 문제가 많다. 그러니 시험에 대비하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한 가지 지식에 대해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잡다한 단편적 지식을 많이 외우는 주입식 학습방법이 주효하다. 이런 면에서 주관식 단답형 시험도 해롭기는 마찬가지이다. [장학퀴즈]나 [도전골든벨] 같은 TV 프로에서 최종적으로 ‘살아남는’ 아이들이 그러하다. 베토벤의 [Moonlight Sonata]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와도 아무도 답을 못한다. 그러다가 아나운서가, 베토벤... 밤... 어쩌구 하면 벨을 눌러 '월광'이라고 맞힌다. 이 순간, 거의 동시에 벨이 울리지만 촌음의 차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잔머리를 빨리 굴린” 아이에게 정답 발언권이 돌아간다.5)

이게 원숭이 재주넘기와 뭐가 다른지 나는 모른다. '도스토옙스키' 하면, '죄와 벌'이고, '죄와 벌' 하면 도스토옙스키고...... “한 권의 책”에서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잡다한 책들의 제목과 줄거리 외우기는 것이 학력사회의 피라미드 상층부로 향하는 지름길이 되는 이런 교육풍토가 누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미완의 그 무엇은 역설적으로 엄청난 성장 가능성이 담보된 ‘그릇(人才)’이련만, 미성숙한 우리 아이들의 창의성과 비판력을 말살시켜가면서 모두를 ‘잔머리 작동 기계’로 만들어가는 미친 사회에서, “공부를 잘 한다”거나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말이 무슨 의의를 가지는가? 아이들 죽도록 공부 시켰으면 이 사회의 발전을 위해 뭔가 남는 게 있어야 하지 않는가? 뭐가 남는가?


소외의 교육체제 속에서도 남는 것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모든 반교육적 폐단에도 불구하고 ‘주입식 교육’은 학습의 주체인 개별 학생에게 “실용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시험에서 살아남기는 곧 삶에서의 살아남기와 직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으로의 진학은 좋은(돈 되는) 직장으로의 입신을 보증한다. “진도 나갑시다” 라고 말하는 영악한 녀석들이 생존피라미드의 상층에 위치할 것이고, 자본주의사회 자체가 또 그렇게 살아남을 것이다(재생산). 반대로, 변변한 직장을 얻지 못하거나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회를 탓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무능을 탓할 것이다. 즉, ‘실업’이라는 사회적 문제가 개인적 능력의 문제로 치환되는 ‘신비화의 기제’가 사회에서 잘 먹혀들어가는 것은 순전히 ‘학력사회’라는 이데올로기가 이 땅의 삶의 주체들에게 어릴 때부터 익숙해져온 결과인 것이다.

"현재의 입시제도는 아이들을 죽이는 것은 물론 바보로 만든다"고 할 때, 누구도 이 말이 과격하다거나 틀린 말이라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 현재의 입시제도가 달라져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누구나 동의할 것이라는 것은 일종의 환상일 지도 모른다. 모두가 동의하는데 왜 아직 안 바뀌었는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혹 이 사회 지배계급의 입장에선 입시지옥의 교육시스템이 매우 실용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우리 아이들을 똑똑하게 만들면 곤란할 것이다. 자연과학이 아닌 인문학적으로 창의적인 인간도 곤란할 것이다. 남들이 YES라고 할 때, NO라고 말할 수 있는 아이는 더더욱 곤란할 것이다. 자신이 보기에 전혀 정답과 거리가 멀어도 시험이라는 ‘권위체제’가 요구하는 것을 정답이고 말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왜 가난한가" 묻지 않은 아이가 필요할 것이다. 이웃의 아픔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제 갈 길만 열심히 가는 아이가 가장 바람직한 유형일 것이다. 0교시에서 밤12시까지 이어지는 야자와 학원수강을 버티는 그 강인한 정신력과 끈기는, 회사원이 되어서 새벽부터 밤늦도록 그리고 일요일도 회사를 위해 일하는 근면성으로 전이될 것이니 매우 좋은 자질이다. 학교도 무한경쟁이고 기업도 무한경쟁이다. 그래서, 한마디로 부지런하면서 이기적인 인간이 이 천민자본주의사회가 필요로 하는 최적의 이상적인 인간상인지도 모른다.



□ 글을 나오면서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


우리 아이들에게 미친 교육시스템이 남겨준 것은 위와 같은 우울한 통계결과이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도 별 생산적 결실을 담보하지 못하는 이런 한심한 교육이 이 사회에서 판을 치고 있는 것은 이 사회에서 교육이 개인적 입신의 수단으로서만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 교육의 목적은 입신에 있으며 입신의 과정은 ‘시험’이라는 선발 기제를 통해 초등학교때부터 한 걸음 한 걸음씩 ‘공든 탑’을 쌓아 가는데 그 정점엔 명문대학이 있다. 모순의 근본 인과관계가 이러하므로, 입시 위주의 교육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교육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환원주의적 사고는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6) 현재의 구조가 더 나빠지지 않게 하거나 지금보다 더 나은 형태의 구조를 만들기 위해 “구조 속의 주체”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교육의 주체들이나 교육운동의 담지자들이 모순이 발생하는 인과관계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문제의 해법은 항상 문제 속에 존재한다. 병이 생겨난 원인을 알아야 올바르게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는 만큼 실천할 수 있기에, 문제가 발생하는 인과관계를 짚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일제고사,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시도했던 초라한 이 글이 읽는 이들에게 약간의 의미를 제공하기를 바라며 글을 맺는다.


1) 변증법적 관점에서, 아이들에게서 놀이터를 차단시키는 것은 그 또래 단계에서 익혀야 할 가장 중요한 발달과업을 터득할 기회를 차단하는 것과도 같다. 사회적 존재로서 한 인간의 인격이나 품성은 공동체 삶 속에서 구성원간의 부단한 대립에 따른 결실(대립물의 통일)이다. 아이들은 서로 부대끼면서 성장한다. 다투다가도 다시 화해하고 또 때론 의기투합하면서, 양보심과 협동심 그리고 이웃의 소중함을 배워간다. 그렇게 이 사회의 건강한 공민(公民)으로 성장해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미친 사회에서는 돈을 써가며 아이들의 성장을 방해한다. 전국가적으로 매년 천문학적인 액수의 사교육비를 지출해가며 우리 아이들의 자발적 성장을 저지하고 있는 것이다.


2) Goldmann, L., The Human Sciences and Philosophy. Jonathan Cape. 1969:.84.


3) 객관식 시험의 허구성이 바로 이 같은 인식론적 문제와 관계있다. 사물의 현상과 본질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은 늘 변화하면서 변증법적으로 발전해간다. 그런데 획일적 정답을 강제하는 객관식 시험은 학생들에게 “이거냐 저거냐” 하는 양자택일의 형이상학적 인식론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험지를 벗어나 삶 속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거의 모든 문제들은 양자택일의 인식론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다. 이것들은 오직 변증법적인 사고로만 그 진리의 근사치에 도달할 수 있다. 인식의 발전을 위해 ‘대립’은 필수불가결하다. 나 안의 두 사고(Hegel이 말하는 두 자기의식)의 대립이나 나와 생각을 달리하는 동료와의 대립을 통해 나의 인식은 변증법적으로 지양(止揚, Aufheben)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습자의 지적 성장을 위해 가장 바람직한 학습은 ‘드릴(drill)’이 아닌 ‘토론’이다. 또한, 정답(고정불변하는 답)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어떠한 시험도 응시자에게 정답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이치에 비추어 볼 때 모든 객관식 시험은 해악할 뿐이다.



4) 맑스주의 철학에서는 이러한 사고를 ‘형이상학적 방법’으로 규정한다.


5) 마오(毛)는 이런 시험을 '게릴라전투'에 비유했다. 교사는 정답을 꼭꼭 숨겨 놓고, 아이들은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 별 가치도 없는 단편적인 내용의 정답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시험. 이런 게릴라전투에서는 교사도 잔머리, 아이들도 잔머리, 모두 잔머리에서 시작하고 잔머리로 끝난다. 그래서 '교육철학자' 마오는 자신의 집권기에 모든 시험을 'open book test'로 치를 것을 제안하였다.

'오픈북'은 정보화시대에서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정보'자체가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으로 학습력을 판가름해야 한다. 잡다한 지식은 'naver.com'에 다 들어있는데, 그걸 외우기 위해 왜 우리 아이들이 밤늦도록, '야자'니 뭐니에 시달려야 하는가?


6) 교육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교육은 상부구조에 속해 있으므로 생산관계를 근간으로 하는 하부구조가 바뀌기 전에는 교육구조가 바뀌지 않는다. 그러면, 사회의 진보를 위해 교육 부문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교육노동운동의 의미 자체가 허물어질 것이다.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대해 일방적으로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부구조의 발전 및 퇴행에 지대한 기여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상대적 자율성(relative autonomy)’이다. 반동적인 정치체제가 언론과 교육을 장악하려 하는 이유 또한 상대적 자율성으로 설명되는데, 이 같은 시도에 대한 저항이 전체 사회의 진보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실상, 교육운동의 몫은 이것이 전부일 지도 모른다.

현재 우리 연구회가 같이 읽고 검토중인 책이다. 이 책을 검토하는 이유는 보다 입체적이고 다양한 관점에서 경제를 공부할 수 있는 대안적인 교과서를 개발하기 위해서다. 가장 널리 알려진 맨큐의 경제학은 너무도 자본주의적 관점을 담고 있다. 스티글리츠의 경제학은 훌륭한 책이지만 완역본이 없다. 크루그먼의 경제학은 주류경제학과 선명한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 이해하기 - 경쟁, 명령..

새무얼 보울즈 등이 이 책의 저자다. 원 제목은.'자본주의 이해하기: 경쟁, 명령, 변화의 3차원 경제학'. 이며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나왔다.

이 첵의 저자 보울즈는 그 유명한 재생산 이론의 제창자인 바로 그 보울즈다. 그가 허버트 진티스와 함께 "자본주의 미국의 학교교육"은 이후 미국에서는 헨리 지루, 마이클 애플에게 유럽에서는 부르디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진보적인 교육자라면 적어도 한번은 읽어보았을 중요한 저작이다. 그런 보울즈가 경제학 교과서라니 당연히 입맛이 당길수 밖에 없다.

이 책은 동안 경제교육에 대한 고민을 쓸어내어 줄 장점들을 두루 가지고 있다. 우선 모든 경제 교과서의 제일 처음에 나오기 마련인 '호모 이코노미쿠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를 통해 기존 경제학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논박하면서 경제가 사회현상의 하나이며 외부에 있지 않음을 설득하는 논리를 제공한다. 사실 이런 주장이야 기존의 마르크스 경제학 관련 교과서에도 충분히 나오지만 문제는 마르크스 주의자들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사투리로 점철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울즈의 책은 기존 주류 경제학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를 다시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있다.

보울즈는 기존의 주류 경제학이 수평적 차원(경쟁)만 다룬 1차원 경제학이라고 비판하면서 여기에 수직적 차원(권력)과 시간적차원(변화)를 추가한 3차원 경제학을 펼쳐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1차원 경제학은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3차원 중 하나로, 또다른 두 차원과 상호작용하는 한 요소로 포함되는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방법론을 그대로 따라간 것이다.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 리카도의 정치경제학의 부정, 즉 사회주의로 정치경제학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학과 사회주의를  모두 한 계기로 포괄하는 정치경제학비판을 수립하려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울즈는 마르크스가 애덤 스미스, 리카르도, 밀의 경제학에 대해 했던 일을 이제 신고전파경제학, 케인즈경제학에 대해 하려는 것이다.

그 결과 책은 두 마리의 토끼를 잡게 해 준다.
1)기존의 주류 경제학을 충실히 익힐 수 있는 교과서 2)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갖추게 하는 좌파 경제학 교과서
이 책의 몇몇 챕터만 골라 요약하면 기존의 주류 경제학 교과서로도 손색 없을 정도로 충실히 공부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여기에 대한 다차원적 비판을 공부하게 되면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되는 것이다.

책 이름부터 흥미롭지 않은가? 경제학교과서, 경제학의 이해 따위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이해다. 이는 기존의 경제학 교과서가 자본주의의 경제법칙이 마치 영원한 "경제법칙"인양 서술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것은 "자본주의의 법칙"임을 명시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이후의 법칙은? 그것은 알 수 없다. 저자의 말처럼 경제체제의 변화는 경제체제 자체 내의 내재적 동력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니. 다만 현 경제체제의 내재적 현상을 잘 분석하면 추세 정도야 알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미국에서 고등학교 교재로 사용되는 책이다. 그러나 원통하게도 우리는 우리나라 고등학생이 이 수준에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이 책을 꼼꼼히 검토한 뒤 우리 실정에 맞는 대안 교과서를 작성해 보려고 한다.
수요일날 시험인데 난 뭐하고 있는걸까요? 나는 어디? 여기는 누구? 아악 살려줘...
일단 시험은 봤으나..패배...개강은 5일도 안남은 상황이네요...안구에 육즙이...

일단 주제도 떨어져가고 그러니 댓글에 관심있으실 주제를 적어두시면 관련글을 구상해 보도록 하겠으니...여러분 모두의 참여로 만들어가는 블로그를(퍽)....


필 자가 교육에 관한 글을 써 내려가면서 프랑스 교육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배운 점들과 함께 프랑스 교육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이자 프랑스 교육이 다른 국가랑 비교해서 전혀 다른 양상을 띌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여 보았다. 그러던중 몇가지 프랑스 교육에 있어서 핵심적이면서도 다른 나라에서 쉽게 배우기 힘든 점들을 찾게 되었다. 그러한 요소들이야 말로 프랑스의 교육이 현대적 교육이라는 증명이며, 진정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데 핵심적이라 생각하는 바이다.


교육 시스템에 대한 계획 도안
이런거 백날 해봐야 기본 사상이 있어야 뭔가 나오지.

1. 시민들 스스로가 당사자인자 감시자인 교육

프 랑스 교육을 정말 한문장으로 압축하라면 필자는 주저없이 이 부분을 고를정도로 필자는 이 내용을 중요시 한다. 그 어떠한 제도, 시스템이라 할지라도 결국 운영하는 것은 인간이며 편법을 통한 제도의 의도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면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큰 효과를 수 없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들 스스로가 교육의 당사자가 됨과 동시에 교육을 감시하고 그에 대한 영향력을 강하게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수 있다. "교사와 교수들에 대한 임금 인상"을 위한 시민들 혹은 학생들의 시위라던지, 대학 자율화에 대한 반대등은 그러한 모습을 가장 많이 투영하는 사회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고사 반대 교사 징계 반대 시위
교사들은 학생들이 저곳에 자진해 나올만큼 존경받진 못한다는 이야기도 된다.

특 히 교사와 교수들의 월급 인상을 외치는 학생들의 행진은 매우 재미있다. 그들의 논리를 살펴보면 노동에 비해서 많은 물질적 보상을 받지 못하는 교육직 종사자들이 비 인기직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더욱 교육직에 매력을 느끼게 하려면 보상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단순히 교육에 대한 관심 이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학생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직접적 당사자가 되지 않더라도 더 나은 교육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투쟁하며, 그 뒤에 남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가는 정말 사회 변혁의 과정을 스스로 실천해 가는 장되어가는 것이다.

2.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


물 론 저러한 감시만이 목적이 되면 교육의 본질은 사라지고 단순한 불평만이 남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감시의 방향은 언제나 한가지, 인재를 잘라내기 위한 교육이 아닌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을 한다. 가장 단적인 예가 바로 평가 제도에 있겠다. 하나는 절대평가이며, 하나는 재시험이다.


슈렉 2 패러디
(클릭하면 커집니다.) 누굴 위한 평가인가?

절 대평가는 한국에서는 매우 불합리한 제도로 알려져 있지만, 예전에 필자가 쓴 교육 글을 읽어보면 상대평가야 말로 매우 비합리적인 교육 제도임을 알 수 있다. 그렇듯 평가 자체가 사람을 걸러내기 위해서가 아닌, 정말 어떠한 분야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그리고 성숙한 민주 시민으로써의 역량을 위해서 교육 시키는 것이다.

한편으로 학생들을 평가하는 것이 정말 능력이 되었느냐의 평가이기 때문에 실수할 경우를 대비하여서 재시험의 가능성을 줌으로써 특수한 상황에 대한 불이익을 최소화 하고 학생의 능력 그 자체를 평가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학생들은 의미없는 경쟁을 최소화 하며 서로가 경쟁자가 아닌 협력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관이 왜 필요하며, 국가라는 단체는 왜 필요하다 생각하는가?)

3. 선택의 자유에 대한 넓은 문


마지막으로 프랑스는 선택의 자유가 매우 넓다는 점이다. 이 자유라는 단어에 대해서 한국의 자유와 프랑스의 자유의 개념은 다르다는 것, 그것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만약 "평일과 휴일을 제외한 모든 날에 마약을 허용합니다."라는 말에 대해서 이것이 자유를 보장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매우 단적인 예이지만 한국과 프랑스의 자유에 대한 인식을 한국식 자유는 저 말이 자유를 허용한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프랑스의 경우에는 이것이 자유를 허용하지 않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서울광장을 둘러싼 버스들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렇듯 실질적 자유를 위해서 프랑스는 거의 무료(년 1만원 수준의 등록금이면 무료라고 해도 무방하다 생각한다.)교육을 실시하며, 공부하는걸 선택하는 학생들에게 주거 보조금, 싼 식비등을 보조해준다. 이렇듯 현실적인 제약을 줄여줌으로 인해서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것 이것이 바로 선택의 자유이다.

4. 맺으며

미 국조차도 프랑스의 교육과 정 반대로 경쟁논리에 의해서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해외의 인재를 받아들여서 발전을 하고 있지, 정말 좋은 인재를 양성하는데에 있어서는 의구심을 표할 부분이 많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유럽, 그리고 프랑스가 2차대전 이후 훌륭한 인재들이 미국으로 대부분 이주하고 난 뒤에도 지속적으로 그 격차를 줄일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역태그 : 프랑스
우리는 때로 삶을 너무 경직되게 바라본다. 경직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에 현재를 종속시키고 왜곡시킨다. 경직된 가치를 품고,매사를 그 가치에 맞춰 평가한다. 심지어 자기 스스로도 그 가치를 배신하고 있음에도 그것은 보지 못하고 타인을 그 가치에 맞추어비난하고 꾸짖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가까운 사람, 가까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잊어버린다. 요즘 영화들을 보면 확실히서양인들의 세계관의 변화를 느낄수 있다. 인간의 이성에 의한 구획, 기획, 이를 통한 전체적인 규율과 통제라는 근대적 사고방식이무너지고 있다. 오히려 그런 합리성으로 포착되지 않는 정서적인 것들, 작은 것들, 그리고 그 소소한 차이들의 이해와 공감이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사 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약점을 지니고 있다. 따지고 들자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 없다는 정말 평범한진리... 하지만 이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종종 잊어버린다. 그것은 항상 우리가 뭔가 더 먼것, 더 큰것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아닐까? 그 와중에 서로를 인간으로, 그리고 나와의 관계 자체가 가치있는 그런 동료로서 바라본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으로바라보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평등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여성 정치인은 정작 오랫동안 같이 지낸 가정부를  가사 도우미로만바라보았고 가정에서 소외된 동생의 아픔에 무관심했음이 드러난다. 그 여성정치인과 어릴때부터 같이 자랐던 이민2세 청년은  그녀를다만 다큐멘터리의 피사체로만 또 자신이 겪은 불평등과 부조리의 장본인이라는 분노어린 바라보았기에 그 아픔까지 새기지 못했다.이런 식으로 우리는 관계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그 무엇을 자꾸 나와 사이에 집어 넣으면서 그를, 그녀를 차가운 대상으로만들어 관계의 의미를 가려버린다.


그리고 비가내린다. 비는 마치 관계를 가린 먼지를씻어내기라도 하듯 내리고, 이 비를 피하기 위해 하룻밤을 보내게 된 어느 농가에서 마침내 이들은 마음을 터놓는다. 서로의 상처를알게 되고, 서로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된다.


이 세계의 인간이 60억이라는데, 내가 알고지내는 사람은 100명도 안될 것이다. 확률로 따지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적은 숫자인데, 이 인연은 보통인연이 아닐 것이다.이렇게 수억분의 1의 확률로 만난 몇 안되는 사람들과의 관계마저 차가운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니 우리의 삶이 그토록 고달픈 것이아닐까? 우리의 시간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우리가 살고 있는 곳,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이 모든 것들이 다시 돌아오지못할 소중한 것들이고 우리에게 의미있는 것들이 아닐까? 그렇게 아주 가까이 삶의 지혜가 있고, 해방이 있고, 진보가 있는게아닐까?


마음이 찌푸릴때 들으면 한두소절만으로도 금새 마음의 평화를 되찾아주는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합창곡"곤돌라 뱃사공의 노래(der Gondelfahrer)"와 함께 영화 "레인"은 내 삶을 그리고 주변을 따뜻하게 돌아보게 만든다.

그냥 말 필요없이 슈베르트의 음악이나 듣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