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삶의 필연성으로서의 교육 (Education As A Necessity of Life)

(요약, Summary)

존재를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삶의 본질이다. 이 유지는 부단한 갱신에 의해서만 보장되는 만큼, 삶은 자기갱신의 과정이다. 영양과 생식이 생물학적인 삶에 필요한 만큼, 교육은 사회적 삶에 필요하다. 이 교육은 일차적으로 의사소통을 통한 전달로 이루어진다. 의사소통은 경험이 공동 소유가 될 때 까지 경험에 참여하는 과정이다. 의사소통은 그것에 참여하는 쌍방의 성향에 수정을 가한다. 모든 종류의 인간 단체의 궁극적인 의의가 경험의 질의 개선에 기여하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가장 쉽게 인식하게 되는 것은 미성숙한 사람들을 다루는 과정에서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회조직이 교육적 효과를 지니고 있지만, 이 교육적 효과가 단체의 목적의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은 어른들이 아이들과 교섭할 때이다. 사회가 그 구조나 자원이 복잡해짐에 따라 형식적 또는 의도적인 교육(가르침과 배움)의 필요가 증대한다. 형식화된 교육과 훈련의 범위가 커짐에 따라, 보다 직접적인 교섭을 통해서 얻는 경험과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 사이에 달갑지 않은 간극이 생길 위험이 있다. 과거 수세기 동안 지식과 전문적인 기술의 급격한 성장을 볼 때, 그 위험이 오늘날처럼 컸던 적은 일찌기 없었다.


(풀이)

제목에서 '필연성'이란 말은 조금 잘못 되었다.

Education As A Necessity of Life -> 이것은 (생물이 아닌) 인간 삶이 유지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서의 교육... 이런 뜻이다.

이홍우의 번역에서 '필연성'이란 의역이 너무 지나치고, 김성숙의 번역은 "생명에 필요한 것으로서의 교육"인데, 이건 완전히 잘못 되었다. life는 생명이 아니라 '삶'으로 옮겨야 한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듀이가 말하는 교육이란, 일반 생명체(동식물)가 아닌 인간 삶에서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의 'life'는 우리말로 ‘삶’과 ‘생명’이라는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제목에서는 (방금 언급했듯이) '생명'이 아니라 '삶'이 맞다. 그러나, 본문에서 life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뜻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그래서 요약문에서 ‘삶’이란 단어는 ‘생명’ 또는 ‘생명체’ 라는 말로 바꿔도 뜻이 통한다. 예를 들면, 첫째 문장을 “존재를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생명(체)의 본질이다”로 읽어도 되는 것이며, 또 그렇게 읽어야만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본문 맨 첫째 문단에서 듀이는 생명체(living thing)와 무생물(ex 돌맹이)의 차이를 “자기갱신(self renewal)의 여부”로 구별하고 있다. 즉, 삶(생명체)의 특징은 “부단한 자기갱신”이란 말로 요약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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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교육]인데, 왜 책의 첫머리부터 ‘생명체’니 자기갱신이니 하는 말이 나올까? 이 맥락을 분석하는 것은 죤 듀이 철학의 전반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초기 듀이 철학의 토대가 된 두 축은 1)생물학주의 2)헤겔 변증법이다.

‘생물학주의’란 생물학 이론에 근거하여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으로서, 19세기 다윈주의(진화론)의 소산이다. 다윈 이전의 서양철학사는 모든 것을 ‘신’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형이상학적 관념론 일변도였는데, 1859년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이라는 한 권의 책이 이 패러다임을 뒤바꾼 것이다. 죤 듀이는 서양의 정신계에서 지적 동요가 심하게 일고 있었던 바로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으며, 자신이 철학자의 길을 가게 된 계기도 대학 3학년에 토마스 헉슬리의 생리학 강좌를 수강하면서였다고 한다.

철학에 눈을 뜨면서 죤 듀이가 맨 처음 관심을 갖게 개념은 “상호 작용 하는 유기체(interacting organism)”인데, ‘유기체’라는 것이 생물학과 관계있고, ‘상호작용’이라는 개념이 헤겔 변증법과 연결되는 것으로 간단히 이해된다. 죤 듀이의 교육철학 전반에서 변증법적 의미가 풍부히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듀이가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절대정신의 개념 따위)을 수용한 것은 아니라는 것도 일러둔다. 물론, 그렇다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신봉한 것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듀이의 사상은 매우 독창적이다. 나중에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듀이의 교육사상을 비판적으로 음미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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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맥락을 짚고 나서 <요약문>의 다음 문장을 읽으면 쉽게 이해가 된다.

즉, 무생물인 돌맹이는 외부 환경(본문에서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충격)에 대해 자기갱신을 통해 극복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부숴지고 말지만, 생명체는 자기갱신을 통해 적응해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체 가운데 인간과 보통의 동식물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보통의 생명체는 영양과 생식을 통해서만 자기갱신을 꾀하며 그저 “생물학적 삶”에 그치지만, 인간은 그것외에 “사회적 삶”을 영위하는 바, 이 사회적 삶의 갱신이 바로 교육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제 1장의 핵심 내용이다. - 1장의 핵심 키워드는 ‘(자기)갱신’이다.(김성숙의 번역본에서는 ‘renewal’ 이란 단어를 ‘새롭게 하기’로 번역하고 있음)


계속해서 <요약>의 다음 몇 문장들은 인간집단에서 ‘경험’에 터한 소통을 통해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듀이 특유의 문체나 어법(code)에 익숙해져 있지 않아서 이 말 또한 그 의미가 쉽게 와닿지 않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담론의 대부분은 사실 알고 나면 간단한 내용들이다.) ‘경험’은 세대간에 축적되어 전수된다. 예를 들면, 농사짓는 노하우를 후손들은 선조로부터 배운 뒤에 다시 자기 자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각 세대간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그 노하우가 점점 정교해지는 것이니, 이것이 듀이가 말하는 ‘자기갱신’이다. 그리고 내가 표현한 ‘전수’라는 말이 듀이의 어법으로는 소통(communication, 번역문에서는 ‘의사소통’이라 옮겼지만, 문맥상 보다 넓은 의미의 ‘소통’이 더 적합하다)과 관계있다.

소통이 교육이라면, 그것은 성인이 아이에게 가르침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수평적인 관계, 즉 집단 구성원 사이에서도 이루어지니 이것이 우리가 보통으로 생각하는 ‘소통’의 개념이다. 그런데 듀이는 수평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소통’도 교육이라 생각하는 것이 주목을 끈다. 그리고 소통의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는(modify) 것이다. <요약>에서 “의사소통은 그것에 참여하는 쌍방의 성향에 수정을 가한다(modify)”는 말이 이런 뜻이다. 아무튼, 인간 삶은 경험과 소통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갱신을 해가며, 수직적으로든 수평적으로든 이루어지는 모든 소통은 곧 교육이다.


사회생활이 바로 의사소통과 동일할 뿐만 아니라, 모든 소통은(따라서 모든 사회생활)은 교육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이홍우 역, p.16 ; 김성숙 역, p.15, 셋째문단, 괄호는 듀이.


이 훌륭한 말은 듀이의 교육철학의 한 중심개념인 “삶이 곧 교육이다”라는 말을 떠올린다. 지금은 무가치한 것으로 폐기처분된 ‘생활중심교육과정’이 죤 듀이의 이 개념을 토대로 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미친 교육’에서 삶은 없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공부를 쉽고 재밌게 할 수가 없다. 쓸데없이 어렵게 공부하며 그것을 잘 버텨내는 “오직” 끈기있는 아이가 “지적으로 유능한 아이”로 인정받는다.


그 다음 두 문장은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 어려운 듯하지만, 간단히 “교육은 백년지대계” 또는 “어린이는 미래의 주역”이라는 논지로 요약된다. 현세대의 경험에서 축적한 노하우를 후손들에게 잘 전수하고 그렇게 잘 교육받아 똑똑해진 후손들이 선조의 노하우를 확대재생산 시켜야 그 집단(부족사회나 국가)이 부흥한다는 것이다. 번역문에서 ‘교섭’은 영어로 ‘association’인데, 이것은 앞의 ‘소통’이란 말과 거의 동어의로 쓰이고 있다. 이홍우선생의 번역이 짜증나는 것이 이런 부분이다. ‘교섭’이라 하면 무슨 ‘단체교섭’이란 의미를 연상시키는데, 현대인 가운데 교섭이라는 낱말을 '관계맺음' 또는 '소통'이란 뜻으로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될 지?


이제 세 문장이 남았다. 이 부분은 쉽게 읽힐 것이다.

대학교 때 교육학 교양과정에서 배웠던, ‘비형식적 교육’과 ‘형식적 교육’의 개념을 다루고 있다. 인간 역사에서 봉건사회까지만 하더라도 교육은 생활 속에서 저절로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논에 물 대는 것이나 새끼 꼬기 같은 것을 아이들이 무슨 연수원에서 배운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비형식적 교육이다. 반면, ‘형식적 교육’의 대표적인 예는 ‘학교교육’이다.

그런데, 인간 삶이 복잡해지고 사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형식적 교육이 비형식적 교육을 대체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은 교육적으로(교육철학적으로) 매우 큰 위험이 있다는 것을 듀이가 적고 있다. 그것은 여러 각도에서 논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이 글의 맥락과 관련해서는...... 교육이 삶에서 분리되는 위험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듀이가 말하는 ‘간극’이라는 것이 분리를 뜻할 것이다.

너무 늦게 글을 올려 죄송합니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더 죄송합니다. 아무튼 시작이 중요하다는 것에 의의를 두면서 센코노믹스를 읽으면서 메모한 내용과 지난 달 독회에서 논의했던 주제만 올립니다. 원래 계획은 논의된 주제들을 정리해서 올리는 것이었지만 게으름과 다른 일때문에 차일 피일 미루다 그냥 제목만 올리기로 했습니다.

죤 듀이, [민주주의와 교육] - 목차


1. 생명에 필요한 것으로서의 교육 (Education As A Necessity of Life)

2. 사회 기능으로서의 교육 (Education As A Social Function)

3. 지도로서의 교육 (Education As Direction)

4. 성장으로서의 교육 (Education As Growth)

5. 준비, 개발, 정신능력배양

 (Preparation, Unfolding, And Formal Discipline)

6. 보수 진보로서의 교육 (Education As Conservative And Progressive)

7. 교육에 대한 민주적인 생각 (The Democratic Conception in Education)

8. 교육의 여러 목적 (Aims in Education)

9. 목적으로서의 자연적 발달과 사회적 유능함

 (Natural Development And Social Efficiency As Aims)

10. 흥미와 훈련 (Interest And Discipline)

11. 경험과 생각 (Experience And Thinking)

12. 교육에서의 사고 (Thinking in Education)

13. 교수법의 본질 (The Nature of Method)

14. 교재의 본질 (The Nature of Subject Matter)

15. 교육과정에서의 놀이와 (Play And Work in the Curriculum)

16. 지리와 역사의 의의 (The Significance of Geography And History)

17. 교육과정에서의 과학 (Science in the Course of Study)

18. 교육적 가치 (Educational Value)

19. 노동과 여가 (Labor And Leisure)

20. 이론적 학과와 실제적 학과 (Intellectual And Practical Studies)

21. 자연과와 사회과 : 자연주의와 인문주의

 (Physical And Social Studies: Naturalism And Humanism)

22. 개인과 세계 (The Individual And the World)

23. 교육의 직업적 측면 (Vocational Aspects of Education)

24. 교육철학 (Philosophy of Education)

25. 인식의 이론 (Theories of Knowledge)

26. 도덕의 이론 (Theories of Morals)

케세라 세라

분류없음 2009/11/02 09:31

  존경하는 조합원선생님들께.


10월의 마지막 밤입니다.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를 선생님들께 풀어놓을까 생각하다가 지난번처럼 좋은 음악과 함께 그 음악과 관계되는 글을 쓰기로 합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이지만 이용의 노래가 아닌 Doris Day의 [Que Sera Sera]입니다. 제가 이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삼은 것은 오늘 이야기가 ‘우리 아이들의 삶’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년째 이 학교에서 5․6학년 영어전담을 맡고 있는데,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날씨가 더워서인지 수업시간에 조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옆 친구가 눈치를 보며 짝꿍을 막 깨우려 하길래 “그냥 나둬라. 잠 오면 자야지” 했습니다. 이 파격적인(?) 나의 배려에 아이들이 맞장구를 치면서 몇몇은 “수업시간에 졸다가 혼난 기억”들을 늘어놓기 시작하는데, 놀라운 것은 “학원에서 졸다가 맞은 아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초등학생을 6교시 까지 학교에서 수업 받게 하는 것도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인데, 그것도 모자라서 대부분의 우리 아이들은 방과 후에 학원 수업 까지 받습니다. 그런데 제 돈 들여 공부 배우러가서 졸았다고 두들겨 맞다니..... 때리는 학원교육 관계자나 또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는 학부모들이나 모두들 참 이상합니다. 웃지 못할 현실은 대도시는 물론 구미같은 중소도시만 하더라도 명문학원 소리 듣는 곳에서는 아이들을 많이 때린다고 하는데 그런 학원일수록 학부모들이 못 보내서 안달이라고 합니다.


학원관계자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학교는 뭐 그리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주나요?” 할 말이 없습니다. 아무튼, 교육에 관한 한 우리는 미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미친'이란 표현이 점잖지 못한 어법이겠으나 앞으로 제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 이 말을 꼭 써야 합니다. 한국사회에서 교육이 현상하는 본질에 대한 적확한 한마디로, "미친 사회, 미친 교육"이란 말 이외의 다른 진술 형태를 생각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一物一語, 한 사물을 정확히 규정하는 표현은 한 낱말밖에 없다 - Flauvert .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학생의 인격을 마구 짓밟는 곳에서 교육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는 뻔합니다. 여기서는 ‘교육’이 아닌 ‘조련’이, 교사와 학생 간의 ‘인간적 만남’이 아닌 ‘상거래 행위’가 있을 뿐입니다. 학습은 학생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발견의 쾌감을 얻게 하는 방식보다는 오직 ‘드릴’로 일관할 것입니다.

이런 학원/학교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떤지 몰라도 학생의 입장에선 두들겨 맞아가면서 재미도 없는 공부를 억지로 하는 것이 즐거울 리가 없겠죠. 초등학생들이 학교에서 학원으로 이어지는 숨 가쁜 일과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정상적인 아이라면 당연히 지루함을 느끼고 한 눈을 판다거나 한두 학원숙제를 빼먹기가 일쑤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아이는 이 이상한 교육시스템에서 낙오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 비정상적인 체제에서 살아남는 아이와 학부모는 어떤 자긍심을 가질 것입니다. 요컨대, 전자에겐 무능함의 낙인이, 후자에게는 미래의 성공을 보증하는 첫 번째 ‘좁은문’을 통과했다는 보상심리가 주어질 겁니다. 바로 이러한 속성에 따라 “많이 때릴수록 학부모들이 더 선호하는” 미친 메커니즘이 고착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저 또한 교사인 동시에 아이의 부모이기도 합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이 미친 사회에서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아이 공부’와 관련하여 부모가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죠. 교육전문가인 우리가 볼 때 “저건 아니다”라고 확신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현실적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초등학교 1~2학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문제 같지도 않은 시험지 풀려서 그 점수를 부모님 확인(도장) 맡아오게 하는 따위. 초등교육전문가인 내가 풀어도 80점 이상 못 맞는 이상한 시험을 망쳤다며 울상 짓는 집 아이를 볼 때마다 정말 한숨과 분노가 터져 나옵니다.


가급적 읽기 편하시게 글을 길게 쓰지 않으려 합니다만, 이 사회에서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이 뭘 뜻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습니다.

[장학퀴즈]나 [도전골든벨] 같은 TV 프로에서 최종적으로 ‘살아남는’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이던가요? 이를테면 베토벤의 [Moonlight Sonata]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와도 아무도 답을 못합니다. 그러다가 아나운서가, 베토벤... 밤... 어쩌구 하면 벨을 눌러 '월광'이라고 맞힙니다. 나는 이게 원숭이 재주넘기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도스토옙스키' 하면, '죄와 벌'이고, '죄와 벌' 하면 도스토옙스키고...... “한 권의 책”에서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잡다한 책들의 제목과 줄거리 외우기는 것이 학력사회의 피라미드 상층부로 향하는 지름길이 되는 이런 교육풍토가 누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지...... 아이들 죽도록 공부 시켰으면 개인이나 사회의 발전을 위해 뭔가 남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중략 -


우리 아이들, 특히 초등학생들의 신세는 '경주마'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첫째, 말의 자발적인 의지와 필요에 따라서가 아니라 외적 강제에 의해 뜻도 영문도 모르고 목표를 향해 죽도록 달려가야 합니다.

둘째, 경주마의 가치는 오직 성적으로만 가늠됩니다. 인간성(?) 좋은 말도 성적이 좋지 않으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셋째, 말의 본질은 ‘야생마’입니다. 말은 들판을 자유롭게 노닐기 위해 태어났지 경주용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경주용으로 전락하면서 말의 본성에 충실한 자발적 성장은 멈추어 버립니다. 트랙 안에서 달리기만 잘 하는 것은 ‘발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퇴행’이라 일컬어야 합니다.

놀이터와 놀이시간을 빼앗긴 어린 아이는 거세된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학교 공부 마칠 무렵 교문 앞에서 아이들 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노란색 봉고차를 보면서 나는, “저것이 닭장차와 뭐가 다른가?” 생각합니다.



자 그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교사를 떠나 학부모로서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해 제가 고민 끝에 정리한 것을 여러 선생님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교육에 관한 한, 제정신이 아닌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미친 사회, 미친 교육”임을 인정한다면, 결론은 자명해집니다. 물론 저는 그 자명한 결론을 창백한 당위론으로만 포장하지는 않겠습니다. 논리 전개의 편의상, 1)당위 2)현실 3)쟁점사항 4)결론 이러한 포메이션으로 구성하여 (이 글에서는) 그 요지만을 적어봅니다.


1) 당위 : 학부모가 되어서 같이 미쳐갈 수는 없다. 목숨 보다 더 소중한 우리 새끼들을 미치게 만들 수 없다.

2) 현실 : 그 미친 생존경쟁의 대열에 미친 척하고 뛰어 든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인내의 결과로 달콤한 열매를 얻는다는 보장이 없다.

3) 쟁점 : 설령 그 달콤한 열매를 취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인간다운 삶의 행복"을 의미하는가? 이 천민자본주의의 미친 교육시스템 속에서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이 대관절 뭘 의미하는가?

4) 결론 : 공부를 스스로 재미있게 하게 하자. 그리고 공부의 결과에 대해서는 “케세라 세라”


케세라 세라!

당위적으로나 현실적으로도 이것이 유일무이한 해결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케세라 세라’는 ‘될 대로 되라’는 뜻이지만, 자유방임형의 정책(?)은 절대 아닙니다. 케세라 세라는 교육이라는 국지적인 영역에 대한 대안이라기보다는 전면적인 대안으로서의 '삶의 패러다임’입니다. 특히 천민자본주의 한국사회에서 만연한 ‘생존경쟁의 패러다임’에 비해 ‘케세라 세라의 패러다임’은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과도 일맥상통하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도리스 데이의 [Que Sera Sera]는 가벼운 왈츠풍의 노래이며 음악성의 깊이도 없지만 노랫말의 이면에는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학생의 날’에 (영어)선생님들께서 아이들에게 이 노래의 뜻을 함께 음미하며 부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공부 못한다는 이유로 주눅 든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리라 생각합니다.

 


When I was just a little girl I asked my mother what will I be.

Will I be pretty? Will I be rich?

Here is what she say to me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What will be will be.

내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 이 다음에 내가 뭐가 될까 물었지

미인이 될 수 있을까?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케세라 세라. 뭐든 대로 되겠지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란다

케세라 세라. 무엇이 되든 네가 될 대로 될 거야


When I was grew up and fell in love I asked my sweet heart

What live's ahead?

Will we have rainbows, day after day?

Here's what my sweetheart said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What will be will be.

성인이 되어 사랑에 빠졌을 나의 연인에게 물었지

우리들의 앞날이 어떠할까?

우리들 삶이 날마다 무지개빛일까?

사람이 대답하길

케세라 세라. 뭐든 될 대로 되겠지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란다

케세라 세라 뭐든 될 대로 될 거야


Now, I have children of my own, they asked their mother.

What will I be?

Will I be handsome, will I be rich?

 I tell them tenderly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What will be will be.

Que sera sera~!

이젠 나도 어머니가 됐어. 내 아이들이 내게 물어왔지

이 다음에 내가 뭐가 될까요?

미남이 될까요? 부자가 될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차분히 일러줬지

케세라 세라. 뭐든 될 대로 될 거야.

미래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란다.

케세라 세라. 뭐든 네가 될 대로 될 거야.



고등학교 동창회 같은 곳에 가보면 학창시절에 “저거 인간 되겠나” 싶었던 아이들이 뜻밖의 모습으로 나타나 친구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또한 공부를 못해서 예상대로(?) 자동차 정비 따위의 일을 하는 친구의 경우도 밝은 표정을 짓는 것으로 미루어 나름 행복한 삶을 살고 있구나 생각게 하기도 합니다. 반면, 무슨 법대/의대를 나와 변호사나 개인병원을 개업했다는 친구들의 경우는 좋은 차를 몰고 다님에도 늘 돈 걱정 하는 모습만을 보여줍니다. 이들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돈자랑 아니면 돈걱정 뿐입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닐뿐더러 자산순도 아닌가 봅니다.

지금 공부를 잘 하든 못 하든, 우리 아이들은 저마다 어떤 모습으로든 미래에 자기 나름의 모습으로 삶을 살아갈 겁니다. 이게 ‘케세라 세라’입니다. “될 대로 되라”하면 우리말 어감상 ‘자유방임’을 연상케 하지만, “What will be will be”란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곧 ‘학생의 날’이 다가오네요.

연중 입시지옥에 신음하는 우리 아이들, 이 날 특별히 더욱 따뜻한 눈길로 아이들을 품으시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긴 글을 맺습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10월 17일 우리 모임의 정기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보울즈 등이 지은 '자본주의 이해하기'의 세번째 부분인, 거시경제 부분을 읽고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책은 다른 경제학 교과서와 달리 거시경제 부분에서 중요한 주제로 빈곤과 불평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빈곤과 불평등이 경제 체제 전체에 대해 주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상세한 데이터를 제시하고 있으며, 이 불평등이 다만 소득의 불평등 아니라 민족, 인족, 성별등 다양한 불평등과 상호작용하고 있는 현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 책의 시종일관한 주제인 "누가 어떤 방식으로 잉여생산물을 가져가는가?"의 문제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논지를 모았습니다. 즉 자본주의에서 자본,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이 모든 잉여생산물을 독점하고 노동자는 다만 자기 재생산이나 겨우 할 정도의 분배를 받는다는 것, 따라서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이런 상대적 불평등의 누적이 자본주의적 분배방식의 정당성 철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업과 인플레이션을 이 지점에서 정치적으로 해석한 부분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자본주의적 분배방식의 정당성 철회를 막기 위해 노동자들은 사실상 끊임없이 노동할 수 밖에 없도록 강제되어야 하며, 실업은 그 강력한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필립스 곡선은 대단히 중요한 계급갈등을 표현하고 있는 셈입니다.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이 부적 상관관계라는 것, 그리고 어느 정도 높은 실업률은 자본가의 강력한 노동강제 수단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인플레이션 율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하는(즉 실업률을 높이라는) 통화주의가 어째서 자본가의 이데올로기이며 신자유주의의 핵심인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논의에 대해 압구정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그쪽 아이들의 입장에 서서 가상의 반론을 제시하셨고, 거기에 대한 재반론이 이어지면서 흥미로운 토론이 계속되었습니다.

다음 달 모임은 11월 21일에 하기로 하였으며, 1)도덕론자로서의 아담 스미스 다시 읽기 2)정보, 통신, 신경제 시대의 노동 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장기 과제로 제출하였습니다.